헬로! 테헤란로!
빛바랜 깃발-일터에서 쫓겨난 지 5백일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투쟁③
지난 1월, 대치동 하이닉스-매그나칩 서울사무소 앞 상경투쟁 때 빛나던 조합원이 있었다. 시원스레 큰 키에 꾹 눌러쓴 모자, 여드름이 듬성듬성 난 앳된 얼굴의 그와 말 한마디 해본 적 없지만, 그는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낮에는 낯선 서울 길을 부지런히 다니며 연대를 하고 저녁에는 말없이 촛불문화제 준비와 진행을 하던 그의 순박한 눈빛. 찬바람 부는 테헤란로 농성장을 녹일 수 있을 것 같던 그 따뜻한 눈동자를 나는 기억한다.
▲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쫓겨나고 두 번째 맞이했던 겨울, 결단이 필요했다.
빛나던 눈동자
그로부터 넉달이 흘렀다. 나는 투쟁조끼를 입지 않고 서 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송전탑 밑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한전 직원이라고 생각 하기도 했다. 예전의 그 느낌이 아니었다. 그 빛나던 눈동자에는 ‘이게 정말 옳은 걸까?’ 하는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1월26일 약속은 깨졌다. 그리고 그 빛나던 눈동자, 빛나던 마음도 함께 깨져 버렸다. 하지만 그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전히 바래지 않은 그의 열정, 그리고 이내 분노와 결단으로 빛나게 될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지회장 옥중 단식 18일, 간부 2명 단식 17일차를 맞던 1월12일, 집단으로 상경해서 유서 작성을 시작으로 14일간 진행했던 상경투쟁은 참으로 힘들었다. 추운 곳에서 자고, 길바닥에서 밥 해 먹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설을 코 앞에 두고 객지에서 매일 매일의 일상투쟁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다.
조합원들 내에서 죽을 순서까지 정해놓고 상경투쟁을 하고 있었기에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조차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들이 설 전에 반드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오늘 청주로 내려갑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감사합니다."
1월 27일 오전,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급히 하이닉스 앞으로 갔지만, 이미 조합원들은 떠났고, 텅 빈 농성장에서는 한창 물청소가 진행되고 있었다.
도지사와 범대위 대표단이 다녀간 후, 밤새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안 된다, 여기서 죽자!”고 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믿고 내려가자”고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청주로 가는 관광버스에 지친 몸과 마음을 싣고 강남 땅을 떠났다. 설을 앞두고 성진애드컴이 타결 되었고, 하이닉스 조합원들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안고 청주로 내려갔다.
“잘 됐네. 근데 이러다가 우리만 남는 거 아냐?”
나는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천막에서 윷놀이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하청지회가 승리라도 한 듯 축하와 부러움의 담소를 나누면서 설을 보냈다. 우리 모두 이들의 귀향에 행운이 있기를, 다시는 이 차가운 강남 땅에서 이들을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었다.
▲ 강남 한복판에서 파를 다음고 무를 깎아 국밥을 만들어 먹으며 투쟁했던 지난 겨울.
하청노동자들이 원하는 것
“도지사가 와서 얘기하고 간 날 밤에 고민이 많았다. 전 조합원이 천막에서 난상토론을 했다. ‘내려가자’, ‘아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더 있자.’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집행부에서 내려가는 쪽이 우리에게 유리할 거라 했고 조합원들도 개인적인 의견을 접고 따르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서울을 떠난 지 넉달이 되도록 이들이 일터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청지회는 회사 앞 조형물까지 철거하고
인내했지만, 들려오는 얘기는 회사가 ‘돈’으로 해결하고 싶어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 믿었던 범대위는 하청지회의 집회 참여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내는가 하면, 조합원들의 양보와 희생만을 요구하고 금전 보상 운운하며 조합원들의 의지를 꺾으려 하기도 했다. 결국 3월28일, 하청지회는 범대위 소속단체 중 하나인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앞에서 범대위의 자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1인 시위를 진행하게 된다.
“생계비를 들먹이며 돈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정말 어이없는 얘기였다. 우리가 돈 몇푼 받으려고 지회에 남은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일한 만큼 처우 개선을 해달라는 거였는데, 정말 말이 안 된다. 10년을 휴일도 없이 친구 만날 시간도 없이 일했다. ‘돈 벌어서 뭐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속 모르는 소리다. 일할 때 쓰는 자재 하나 사달라고 얘기하는 것도 눈치 보면서 일했다.”
기다림과 기만에 지친 하청지회 조합원들이 새로운 결의로 대오를 정비하고 고강도 투쟁을 준비하면서 내건 현수막 하나가 있다.
“하청노동자가 진정 원하는 것은 돈 몇푼이 아니라 '일터'입니다.”
▲ 지난 겨울 촛불문화제 때,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소원지에 적어 아이와 함께 매달고 있는 조합원.
목숨을 몇번 걸라고 하는 건가
“동지 여러분께서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는 곳은 지난 1월 우리가 우의제에게 속아서 내려갔던 바로 그 자리 입니다. 문밖에는 용역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어 언제 침탈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농성장을 사수할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들의 엄호를 부탁드립니다.”
5월24일 밤, 하청지회 오병웅 부지회장의 전화 목소리가 테헤란로에 울려 퍼졌다. 그를 포함한 38명의 조합원들이 서울사무소 12층 하이닉스 우의제 사장실에서 이틀째 직접대화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 하청지회 조합원들은 넉달만에 다시 이 곳에 왔고, 이번에는 38명의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원청인 하이닉스와 매그나칩 반도체에 좀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웬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과 국회 앞 집회 등의 일정으로 23일부터 상경투쟁을 한다 했을 때, 참 뜬금없다 생각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23일 상경투쟁 처음 일정인 열린우리당 집회를 두시간쯤 앞두고 문자가 날아 왔다.
▲ 새로운 결의와 결단을 하며 내건 현수막, ‘진정’과 ‘일터’는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삭발투쟁은 이미 패션이 되어버렸다. 백일 이백일은 명함도 못 내밀고, 교섭 한번 해보려고 카터칼로 동맥을 끊는 것이 현실”이라던 어느 활동가의 말이 떠오른다.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점거’는 이제 언론에서는 크게 놀라울 것이 없는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고민과 고통, 고도의 결의와 용기가 필요하다. 5백일, 그 긴 기다림 끝에 사장실 점거를 하게 된 하청지회 조합원들 역시 그러했다.
“아, 시린 세월에 참혹한 노동에 피눈물로 얼룩진 수많았던 날들이 오늘밤 이다지도 가슴에 못 박혀 홀로 새는 이 밤도 꿈이어라 노동의 세월~”
가수 박준씨는 이 노래를 2001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150명이 삭발할 때 부르고 처음 불러본다고 했다. 기륭전자분회 유흥희 조합원은 투쟁사에서 “노동자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몇개를 걸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절규했다. 분위기는 내내 숙연하다.
두번째 테헤란로 노숙투쟁, 이틀째 밤이 깊어간다.
연정 르뽀작가
|
|
|
6499
325
12
헬로! 테헤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