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도나도 경제 걱정에 아우성이다. 민생이 이 지경인데 국가보안법으로 이념대립만 하고 있다는 볼 멘 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사실 살기 어려운 시기인 것은 맞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는 고전적 진리를 생각한다면, 민생고에 허덕이다 못해 정치를 질타하는 목소리들은 천만번이라도 정당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가 민생을 살리지 못하는 원인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전력투구하는 경향 때문이라는 해괴한 논리는 민중의 고통을 이용하여 음흉한 정치적 잇속이나 챙기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보다는 민생이 우선이다”라는 해괴한 논리에 진보진영까지 놀아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작금의 고통스런 민중의 삶에 스스로 고뇌만 많은 무능력자이다. 때문에 민중의 삶에 시선을 맞추어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박수를 보낸다. ‘개혁도 민생이 뒷받침될 때 이룰 수 있다’는 조정래 선생의 말씀이 가지는 진실성에도 공감하며 특히 비정규직 투쟁에 힘을 경주하려는 진보세력의 헌신에는 전폭적 지지를 보낸다.
하지만 고단한 민중의 삶을 비집고 들어선 혹세무민의 논리가 무분별하게 횡행하는 것에는 단호한 비판을 하고자 한다. 이 글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정치적 투쟁을 민중의 삶을 개선하려는 투쟁과 대립시켜 바라보는 ‘민생우선론’에 대한 비판이다.
1. 민주노동당의 변화를 바라는 조선일보
12월 16일자 조선일보는 ‘이념에서 민생으로’라는 제목으로 민주노동당내의 논쟁을 기사로 다루었다. 주된 내용은 ‘국가보안법 철폐에 올인하는 현 지도부’를 비판하는 당내 목소리들에 관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민주노동당의 내부문건을 인용하는가 하면 인터뷰라도 했는지 당직자들의 말을 직접인용하며 ‘민생우선론’이 커져가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재영 정책실장과 문명학 기획조정실장의 이름을 거론하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중 몇 명을 따로 분류하여 ‘노선 전환’이라는 화두를 내놓고 있다.
조선일보의 기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념에서 민생으로 노선을 전환하라’라는 것이다. 필자는 조선일보에 실명으로 인용된 당직자 및 국회의원들이 조선일보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조선일보에서 인용했듯이 “민생과 빈곤퇴치는 민노당의 최우선 가치”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민생이 최우선이라는 말이 다른 과제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전략적이고 장기적 과제일 수 있는 민생은 민주노동당이 일관되게 추구하고 실현해야 한다. 다만 특정시기에 일시적으로 다른 과제들의 실현에 결정적으로 힘을 넣는 것은 역사와 민중을 책임지는 진보정당이 수시로 채택해야 할 방법이다.
하지만 조선일보를 위시한 수구세력들이 추구하는 것은 민생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국가보안법 유지이며 기득권 방어이다. 이를 위해 관심도 없는 민생을 운운하며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이 민생정치를 가로막는다고 떠드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분명한 비판의식을 가지지 않고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민생과 대립시켜 바라보는 그 모든 견해는 진보와 인연이 없다.
2. 민생이라는 거짓말
아주 솔직하게 따져보자. 지금 국가보안법 철폐에 투입되는 모든 정치적 역량을 민생으로 올인하면 정말로 민생이 달라지는가. 만약에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이 집중되어야 할 향후 한, 두 달안에 민생을 획기적으로 살릴 수 있다면 필자는 두 말 하지 않고 ‘민생올인’을 주장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경제상황이 어렵고 민생이 어려운 것은 단기간의 처방 혹은 부분적 개선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 투기자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있는 한국경제는 민중의 가혹한 희생을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점점 굳어져 가고 있다. 민생이 어려운 것은 일시적 불황 때문도 아니고 일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도 아니다. 민생개선은 멀게는 자본주의의 폐절, 적어도 신자유주의 방식의 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민생은 민주노동당의 장기적이고도 전략적인, 그리고 일관된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제의 실현에는 진보진영의 세련된 대안정책도 있어야 하고 신자유주의적 악화를 막는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는 민중정치역량이 필요하다. 진보운동의 과정은 바로 이 민중정치역량을 축성하는 과정이며 이를 가로막는 악법을 철폐하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국가보안법 철폐는 근본적 민생을 실현하기 위해 결집되어야 할 민중정치역량의 가장 큰 장애물을 걷어치우는 작업이다.
이러한 의미를 보지 못하고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과 민생을 대립시켜 파악하며 심지어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폄하하고 부정하는 일각의 흐름은 실로 무책임하다고 하겠다.
지금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과 대립시켜 운위하는 민생은 한 마디로 거짓말이다. 민생이라는 거짓말로 국가보안법 철폐 전선을 흐리는 목소리는 많아도 민생개선의 대안을 내놓는 목소리는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삶에 허덕이는 민중을 볼모로 민생을 운운하며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부정하거나 홀시하는 사람들은 민중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3. 민생우선론은 개발독재론의 변형이다.
민주주의보다 경제가 우선한다는 이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이다. 이 말은 지금 ‘국가보안법 철폐보다 민생이 우선이다’라는 말로 변용되고 있다. 전자의 말은 옛날 반동세력들이 하던 말이고 후자의 말은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어지럽게 내뱉고 있는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는 민주주의가 필요 없으며 민주주의는 부의 축적 이후에 가능하다는 논리는 보수 정치학의 고전적 민주주의론이다. 이 논리는 수 십년간 한국 사회의 지배논리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먹고 사는 문제를 대립시켜서 개발된 이론이 바로 박정희의 개발독재론이다.
부의 축적을 우선시하는 고전적 민주주의론은 우스개 거리가 된지 오래되었다. 그 속에 감추어진 제국주의적 논리가 파헤쳐진 것도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논리를 다양하게 변형시켜 지배논리로 삼는 현실적 경향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박정희 신화가 살아 있고 개발독재론이 암약한다.
가난한 인간도 인간이다.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해서 인간의 권리, 민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생이 어렵다고, 민생개선투쟁이 중요하다고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폄하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직도 박정희 신화에 열광하고 개발독재론을 옹호하는 무리들은 민주주의가 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하는지 증거를 대야 한다. 동시에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민생에 대립시켜 홀대하는 사람들은 왜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이 민생을 가로막는지 증거를 대야 할 것이다.
4. 진보는 진보의 철학으로
진보세력에게는 진보의 철학, 진보의 논리가 일관되게 정립되어야 한다. 용어와 말투를 좀 바꾸었기로서니 반동적 민주주의론과 개발독재론의 변형논리들을 생각도 없이 읊어서야 되겠는가.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를 중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인간다운 권리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 결코 대립시킬 것이 아니다.
민생과 개혁은 결코 대립되지 않는다. 개혁이 민생이고 민생이 개혁이다. 개혁을 잘해야 민생도 잘하고 민생을 잘해야 개혁도 잘한다. 그것은 개혁과 민생이 궁극적으로 민중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개혁이냐 민생이냐’가 아니라 ‘민중의 이익이냐 아니냐’이다.
지금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중대한 개혁을 다루면서도 툭하면 야합과 생색의 늪으로 빠지려 하는 것은 민중의 이익을 하늘같은 원칙으로 모시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중을 하늘로 삼고 흔들림 없이 개혁과 민생을 추구해야 할 세력은 민주노동당을 위시한 진보세력이다.
혹여나 비정규직 철폐투쟁, 민중생존권 투쟁을 홀시하는 편향이 우리 안에 있다면 서로 비판해주고 함께 제자리를 잡아가자. 하지만 반동적인 민생우선론으로 현재의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폄하하거나 부정해서는 안된다. 진보는 진보의 철학으로 길을 찾고 서로를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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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과 개혁은 결코 대립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