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함께 해주시는 분들께 드립니다.
지난 주말에는 늦가을 비가 밤새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더니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다시 비가 내립니다.
많이 오는 비는 아니지만 이 비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려니 생각합니다.
9월초 명동성당에 들어올 때 낙엽이 지기 전에는 성당을 나가려니 생각했습니다.
이제 성당 성모동산 둘레의 은행나무에도, 느티나무, 단풍나무에도 노랗고 붉은 색 이파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노란 은행잎이 날리고 단풍든 이파리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때면 수배자라는 잠시 내 처지를 잊고 분위기에 취합니다.
이른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의 풍경은 더욱 그러합니다.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러 옵니다.
그들은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갈 곳이 있다는 게 그리도 부러운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분명 나도 돌아갈 집이 있고, 나가서 만날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성당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합니다.
언제 나는 집에 가는 그들의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세상 밖으로 나가본 지 벌써 7개월 반이 지났습니다.
용산참사가 발생한 지 15일이면 300일이고, 20일이면 10개월입니다.
그 시간의 4분의 3을 저는 수배자로 순천향병원과 명동성당의 영안실에 머물러 있습니다.
명동성당의 밖을 기웃거리면서 밖에는 무슨 일들이 있을까를 생각하고는 합니다.
세상 바깥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텐데도 성당 밖 세상이 그리워지는군요.
지난 달 10월은 용산참사 나고 제일로 괴로웠던 달이었습니다.
정운찬 총리가 추석날 오전에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을 방문한 것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눈물만 글썽이다 갔습니다.
결국 우리의 걱정대로 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되어 도리어 사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중앙정부는 책임질 수 없고, 장례부터 치르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중앙정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면 왜 민간의 민사문제였던 철거민과 재개발조합 간의 문제에 경찰이 개입하여 사람을 여섯이나 죽였는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 수 없고, 10개월 동안 기다렸는데, 이제 빈손으로 장례를 지내라는 것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현장을 지켜온 이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국민을 죽인 정부가 진정성을 담아 사과 한 번 못하겠다는 이런 오만한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끔찍한 10월의 마지막은 사법부가 장식했습니다.
9월부터 재개된 재판에서는 검찰의 기소내용이 하나하나 깨져나갔습니다.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던 특공대원은 보지 못 했다고 진술을 번복했고, 검찰 증인으로 나온 전문가들은 화재의 원인을 화염병으로 특정할 수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상황을 모르는 채 특공대원들은 진압에 투입되었고,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간 뒤 대화로 설득하려는 노력은 없이 3시간 만에 전격 진압작전을 계획하고, 25시간 만에 누가 봐도 무리한 진압을 했음이 검찰의 증인으로 불려나온 경찰과 소방관 등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5-8년의 중형을 구형했습니다. 그날이 10월 2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0월 28일 재판부는 재판에서 나온 번복된 진술을 모두 무시한 채 검찰의 기소내용을 그대로 모두 인정해서 5년, 6년의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철거민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올라간 행동이나 망루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용역에 저항하는 것은 모두 “국가법질서의 근본을 유리하는 행동”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은 이겼는데, 판결에서는 패배한, 사법치욕의 날이 하나 더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재판부는 검찰이 3천 쪽의 수사기록을 내놓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검찰은 헌법재판소에 만약 법원이 압수수색을 단행했다면 막을 수 없었는데, 법원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며 법원을 조롱했습니다.
이로써 1심 재판은 치졸한 정치재판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날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유가족들은 통곡했습니다.
특히 고 이상림 열사의 부인인 전재숙 씨는 오열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찍힌 작은 아들 이충연을 재판부는 결국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로 몰았던 것이죠.
추측성 판단으로 경찰의 심중을 폭넓게 헤아려 인정하면서 철거민들이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화염병을 던졌겠느냐는 항변은 묵살했습니다.
철거민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 충분히 화염병을 던져서 동료들을 죽게 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저녁 용산참사 현장 추모대회에서 유가족 전재숙 씨는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이명박 정권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밤 늦게까지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을 위로했던 문규현 신부님이 다음날 새벽 단식 열흘을 넘기면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심장 박동이 10분 이상 멈추었다고 해서 모두 숨죽여 걱정했습니다.
만에 하나 신부님이 잘못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하느님의 가호였던지 사흘 만에 일어나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기만과 배신, 그리고 절망의 한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단식 대표단들의 연행을 불사한 투쟁 덕이었습니다.
광화문 종합청사와 청와대 근처 청운동 사무소 앞에서 그들은 단식을 하면서 1주일에 두 번이나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단식농성조차도 하지 못하게 막는 경찰이고, 이 나라 정부였습니다.
용산참사는 어떻게든 틀어막으려는 저주스러운 정부를 우리는 곳곳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정부를 견제하는 본연의 자세를 잊고 정부의 입장에서 적극 편들기를 하는 사법부를 봅니다.
용산 투쟁은 그래서 이 나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보할 수 없는 투쟁입니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와 인권과는 다른 질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해 가는 투쟁입니다.
지금까지 민중 배제의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당연하게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무척이나 허약했습니다.
부의 강탈을 허용하는 민주주의는 재개발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게 됩니다.
판자촌, 달동네로 상징되던 빈민들을 약탈해먹고, 이제는 중산층까지 털어먹으려는 탐욕스런 재개발을 두고는 민주주의는 여전히 한 명의 독재자가 대통령으로 등극하면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투쟁 속에서 깨닫습니다.
용산참사는 가난한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은 주권자인 국민의 범주에서 제외되었음을, 그들은 진압의 대상이고, 억압의 대상이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그렇게 잔인하게 진압하여 인명을 살상하고도 사과 한 마디 없이 도심 테러범으로 몰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철거민들만의 주장이었던 순환식 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해왔습니다.
지난한 철거민들의 투쟁으로 가수용단지와 임대주택이 법과 제도로 들어오게 되었듯이, 이제는 임시상가와 임대상가가 상가세입자에게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역설해왔습니다.
건설자본과 땅 투기꾼들의 부만 불리는 살인개발, 폭력에 의한 공포로 강제로 쫓아내는 살인 재개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함을 우리는 경찰에 연행되고, 소환되고, 구속되고, 수배되면서 주장해왔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새로운 역사는 정권의 폭압에 맞서서 싸우는 용산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란 점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을 냉동고에서 열어 장례를 지내드려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상복을 벗도록 해야 합니다.
고단하게 매일의 투쟁을 전개해왔던 용산4구역과 전철연 사람들, 용산범대위 사람들, 그리고 신부님들도 다른 차원의 투쟁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시간이 늦지 않도록 노력을 다해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조건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투쟁은 장례를 지낸 다음에도 계속해서 이명박 정권 내내 그리고 이 정권이 끝나고도 계속 추진해야 하는 투쟁입니다.
이를 위한 준비도 서둘러야겠지요. 그리고 임시상가-임대상가를 법제화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해야 합니다.
이제 재개발 문제를 진보운동은 자신의 과제로 안고 싸워나가야 합니다.
주거권, 생존권을 무참하게 짓밟은 위에서 권력과 부를 추구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용산참사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은 장례를 지내고부터가 실제 시작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 내내 용산범대위는 서울 시내 10곳에서 6시간씩 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300일에 맞추어서 300인의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 분수대 앞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다른 1인 시위자는 놔두고 용산범대위 1인 시위는 아무런 법적인 근거도 없이 무조건 막습니다.
1인 시위조차 항의하고,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들은 두려운 것입니다.
‘용산’의 ‘용’자만 꺼내도 저들은 호들갑입니다.
내일 14일에는 오후 2시부터 서울역에서 300일 추모대회를 갖고, 1천인 1인 시위를 서울 시내 1천 곳에서 진행합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서울역으로 나와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편지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지난번 단식대표단이 단식을 할 때 명동성당에서 같이 단식을 했습니다.
같이 하는 선배가 건강상태가 안 좋아서 열흘 만에 단식을 중단했는데, 단식 중에 1심 재판 선고가 있었지요.
너무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술조차 마시지 못하니 더욱 속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도 단식하면서 연행된 대표단들이 생각나 속이 끓었습니다.
영안실에서 영안실로 이어지는 수배생활은 언제나 끝날까요?
빨리 장례를 모신 뒤에 감옥을 가려는데, 그 일도 어렵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으로 걱정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어서 어려운 수배생활을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 비가 그치면 이제 본격적인 겨울인데요,
신종 플루 걸리지 말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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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박래군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