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00억원과 1억원. 노동자에게 억이라는 단위는 버겁다.
10조원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10조원의 순이익을 한 해에 남긴 기업이 있다.
삼성전자다.
삼성전자 본사에는 기자실이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기자들도 80명이 몰린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순이익 100억불 클럽 가입'이라는 보도자료를 돌렸다.
놀라운 기록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103억 달러. 10조7867억원이다.
세계의 모든 기업 가운데 1년 동안 순이익을 100억 달러 넘게 낸 기업은 9곳밖에 없다.
게다가 순수 제조업체로는 일본 토요타자동차가 유일하다고 자랑했다.
달러의 약세에 따라 원화가 강세로 돌아선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업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성과다.
순익 10조 삼성전자의 1억짜리 '매수극'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그 세계적 '초일류기업' 삼성전자가 민주노총의 금속노조에 가입한 노동자에게 거액을 건네며 조합탈퇴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40대 노동자에게 탈퇴 조건으로 1억이 넘는 돈을 준 '지급확인서'도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기자회견으로 공개되었다.
돈으로 '탈퇴'를 강요받은 40대 노동자의 증언은 우리가 과연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보라. 인사부 간부가 노동자를 불러 가족의 안부를 물은 뒤 노조가입을 시인하라며 다그쳤다.
다른 가입자 이름까지 대라며 살천스레 추궁했다.
그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부당노동행위를 넘어 인권유린 행위다.
게다가 압박에 못 이겨 일터는 지킬 생각으로 탈퇴에 동의하자 그 '간부'는 "삼성의 경영이념에 배치되는 사고로 노조에 가입했던 사람은 삼성에 더 다닐 수 없다"며 퇴직을 강요했다.
가증스러운 노동탄압이다.
삼성이 법 위에 군림한다는 판단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민주공화국의 테두리 안에 있는 세계적 첨단기업에서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원시적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삼성의 노동탄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하청업체인 애니스 노동자들에게 행한 부당노동행위나 삼성SDI의 조직적인 위치추적 따위도 인권유린의 전형적 사례들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놀라움을 넘어 생게망게한 일이 있다.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공개적으로 밝힌 노동탄압과 인권유린 사건이 흐지부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삼성전자 쪽은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난 후 이제 와서 기자회견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의도의 순수성을 문제삼기도 한다.
참으로 절망스러운 풍경 아닌가.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 희망은 피어나게 마련이다.
삼성전자가 의도의 순수성을 공격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필자는 순수의 정수를 읽는다.
당사자인 홍두하 씨는 기자회견에서 증언했다.
"사측이 사실상 감금한 상태에서 가족을 들먹이며 회유하는 바람에 노조도 탈퇴하고 졸지에 회사까지 사직하게 됐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
10조의 순이익에 견주어 1억은 저들에겐 아주 작은 빵부스러기에 지나지 않겠지만, 노동자로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돈이다.
하지만 홍씨는 무너지지 않았다.
"노조를 탈퇴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동지에 대한 미안함과 허무하게 굴복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으로 사실을 폭로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목이 메였다.
보도에 따르면 홍씨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기자회견이 있기 전날 삼성전자의 '복직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회유' 당하지 않았다.
우린 정말 그 앞에 떳떳한가
그렇다.
40대 노동자 홍두하는 당당하게 노동자로 거듭났다.
누가 그에게 한 때 포섭 당했었다고 돌을 던지겠는가.
냉철하게 성찰해보자.
노동자에 대한 회유와 포섭은 과연 오늘 삼성전자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모든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조금 더 솔직히 돌아보자.
이미 우리 대다수는 저들에게 포섭 당해 있지 않은가.
포섭 당해 있으면서도 포섭 당한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진심으로 홍두하 동지에 경의를 보내는 까닭이다.
<한겨레> 비상임논설위원 손석춘
2005년01월19일 16: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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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두하 동지에게 보내는 경의(손석춘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