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태정 지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현장에서 미래를) 추천사입니다.
3번째 인쇄에 들어가면서, 노동자운동사 강의를 많이 하고 다니는 연구소 후배 최규진과 나한테 추천사를 부탁했습니다.
이름있는 선생님이나 선배가 아닌 후배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한 까닭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노동자 운동사 위에 이름 석자 새겨주려는 우정의 표시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 노동해방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
노동자운동사 강의를 하다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만날 때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옥사한 이한빈과 이 책을 쓴 안태정이다.
이한빈이 전평을 세울 수 있게 한 수 많은 선배노동자들을 표상한다면 안태정은 역사의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전평을 재구성하여 살려낸 역사학자이다.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전평 위원장 허성택의 기념사가 전국노동자신문 4월 26일자에 실렸다. 허성택이 ‘메-데-에 제하야 노동자 동무들에게’ 소개한 인물이 바로 이한빈이었다.
" 우리들은 60주년 메이데이를 오늘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맞게 된 것은 연합국의 덕택과 반일 민족 혁명가들의 거룩한 희생의 선물에서 얻은 것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함남북에서 노동운동하든 혁명자들이 망명을 하면서 또는 땅굴 생활과 삼림 생활을 하면서 일제 경찰의 총칼을 방어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칼을 유일한 무기로 하고 용감하게 싸운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이한빈(李翰彬)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 사건으로 망명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 형을 마치고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 구금소에 구금됨으로부터 '정치 운동자를 내 놓으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7개 요구를 들고 두 번 단식 투쟁에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에 단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반역자임으로 죽이라고 말로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오 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를 최기(最期)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었던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 못하고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이한빈은 단식 투쟁을 하다가 예방구금소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허성택의 말대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선배들의 본보기였다.
1920년대 ‘노동자가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를 내세우고 싸웠던 ‘조선노농총동맹’의 노동자들, 그리고 1930년대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추구하며 싸웠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노동자들, 그들의 조직과 투쟁이 있었기에 1945년 11월 초 노동자들의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만들 수 있었다.
1945년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20만여 명의 조직 노동자들을 대표한 515명의 대의원들이 서울에 올라와 16개의 전국적 산업별 단일노조를 결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1월 5,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결성하였다.
이 책의 지은이에 따르면 전평에는 16개의 전국적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합동노동조합, 그 아래 1천 194개의 분회가 속해 있었으며, 전국 212만 여명의 노동자들 가운데서 10% 정도인 21만여 명이 참가하였고, 1946년 2월에는 57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해방공간’에서, ‘인민이 공동으로 통제.관리하는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조직과 활동은 오래 동안 잊혀진 역사였다.
한국전쟁 이후 현실을 지배한 세력이 틀어쥔 과거의 기억에서 전평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러나 골짜기에서 흐르던 물줄기가 끊겼다고 증발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바닥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는 어디선가 다시 겉으로 드러난다.
오래 동안 역사의 무덤 속에 철저하게 묻혀 있던 전평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낸 이들은 투쟁하는 후배 노동자들이었다.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을 겪은 뒤 이 땅의 선진 노동자들은 노동자 전국 조직과 전국적 산별 노동조합 건설을 준비한다.
노동자 역사를 공부하면서 흐르다가 사라져버린 물줄기를 다시 찾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무덤 속에 생매장 당했던 선배 노동자들의 경험을 한 갈피씩 들춰나갔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전평은 노동자 전국조직이 딛고 건너갈 징검다리, 의지할 언덕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
선배들의 조직과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외국노동운동사만 뒤적이고 있어야 했을 만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경험은 소중한 것이었다.
전평의 역사가 현실에서 필요했으나 제대로 알기가 힘들었다.
전평을 다룬 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모를 살피기에는 아직 소략하였다.
전평의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을 어렵사리 복사하여 읽어도 전체상이 잘 드러나질 않았다.
전평에 관한 과거의 흔적과 기억을 선택하여 재구성하고 해석할 사람이 필요했다.
직간접으로 자본과 권력에 기생하며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기득권자가 되어버린 강단 역사학자들에게 그러한 작업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변화하는 작동방식과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자본의 시대를 지양하고 노동의 시대를 건설하는 일에 복무’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큰 용기와 희생이 필요했다.
안태정 형이 이러한 어려운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 성과가 이 두툼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다듬어 책을 낼 때, 다시 2쇄를 인쇄할 때, 부탁을 받고도 책에 누가 될 것 같아 추천사를 쓰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이제 책 한 귀퉁이에 이글을 덧붙이려는 까닭이 있다.
이 책의 성과를 마치 내 작업 결과인 것처럼 강의와 글쓰기에 베껴 써도 노동자해방운동에 무기가 된다면 오히려 고맙다는 안태정 형에게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갚을 길이 없었다.
이 글이 빚 갚음이 될지 모르겠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태정형이나 나나 이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과거의 기억을 장악하는 자(세력)가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서서 노동자 해방의 미래를 여는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해, 내 강의를 듣는 이들이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남의 노동에 기생하며 놀고먹는 인간이 아니라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차별하지 않으며, 자기가 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보람 있고 행복하면서 사회에서도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노동자이자 지식인이고 예술가인 사람, 모두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설 수 있는 사람, 남을 짓밟고 경쟁에서 이겨 저 혼자 잘 살고 잘난 체 하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남과 잘 어울리고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 자연과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온 몸으로 신명나게 흥을 풀어낼 줄 아는 재주도 있는 사람. 간단히 줄이면 ‘스스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모두가 다 함께 건강하고 제대로 잘 살 수 있는 세상,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실천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해방된 인간상이라고 본다.
안태정 형이 강조하는 표현으로 바꾸면 ‘각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결사’, 즉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 = 노동자 연합사회’를 꿈꾸는 사람들, 특히 선진 노동자들이 이 책을 꼭 읽어 보았으면 한다. 이 책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자본시대를 균열내는 한 점 불꽃과 그 틈바구니에 뿌릴 노동시대의 한 점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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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