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깃발-일터에서 쫓겨난 지 5백일,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 투쟁 ①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조합원 송전탑 고공농성 돌입” 2006/05/17 6:58am 새벽이나 한밤중에 핸드폰 진동음이 울려 댈 때마다 심장은 화들짝 놀래지만, 내 몸은 생각하기도 전에 움직인다.
망설임도 고민도 없다.
일어나서 씻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카메라를 챙기고 강남터미널로 간다.
새집을 짓다
11시, 하복대 죽천교에 도착했다.
하청지회(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과 금속노조 김천욱 수석부위원장, 지역 금속노조 간부들이 송전탑 밑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15만4천 볼트가 흐른다는 37m 송전탑 바로 아래에 가서 올려다 보니 새집이 세 채가 있다.
위에 두 채는 지푸라기로 지어진 진짜 새집이고, 철판 깔개와 가장 자리에 천을 둘러 만든 제일 밑에 있는 새집이 두 명의 조합원들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두 명이 나란히 앉아 발이나 뻗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합원들의 간절함이 묻어 있는 손으로 직접 쓴 현수막. “우리는 일하고 싶다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5월1일 집회 때 노래패가 외쳤던 구호다.
밑에 있는 조합원들은 대체로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눈치다.
“6시에 연락을 받았다.
다 올라가야 되는 줄 알고 준비를 해 왔다.
와보니 이미 올라가 있더라. 금요일날 비 온다는데 위험하진 않을지 걱정이다.”
집회 중에 조합원들이 종종 위를 올려다본다.
얼굴이라도 살짝살짝 보여주고 가끔 손이라도 한번씩 흔들어주면 밑에 있는 동지들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련만, 두 명의 조합원은 움직임이 없다.
안전장치도 없는 위태로운 둥지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하천 옆이라 그럴까. 날씨는 습하다.
정말 사소한 문제로도 싸움이 일어나기 딱 좋은 그런 날씨다.
핸드폰으로 뽑으면 바로 나온다니께
황사 때문이었을까.
깃발이 누리끼리하게 빛이 바랬다.
“오늘이 며칠째죠?”
조합원들끼리 직장에서 쫓겨난 지 며칠인가를 두고 옥신각신 한다.
결국 한 조합원이 핸드폰으로 계산했다고 얘기하자 다른 조합원들이 수긍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핸드폰으로 바이오리듬인지 뭔지 뽑으면 508일이라고 바로 나온다니께. 아주 편혀.”
하지만, 필자가 나중에 기념일 계산으로 다시 해보니 오늘은 이들이 일터에서 쫓겨난 지 509일이 되는 날이다.
이들은 단지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2004년 12월25일, 직장폐쇄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날에는 계약해지라는 연말 선물을 받았다.
처음에 천막 앞에 투쟁일수를 알리는 숫자판을 만들 때 세 자리로 만들려고 하자 몇몇 조합원들이 “두 자리면 끝날 텐데, 뭐 하러 세 자리로 만드냐”고 항의를 했다 한다.
뺏지 모으기가 취미인 조합원이 있었다.
그가 뺏지 30개를 모으면 불법파견 판정이 날 거라 했는데, 정말 30개를 모으니까 불법파견 판정이 났다.
그래서 이제 50개가 되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했는데, 50개가 된 지 한참이 되도록 아직 이들은 거리에 있다.
100일까지는 부지런히 계산하고 외웠을 것이다.
어쩌면 백일을 기억하고 결의를 하는 자리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일이 가고, 이백일이 가고, 삼백일, 사백일이 지나게 되면서 더이상 이들에게 날짜 계산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월이 흘러 흘러 계절이 6번 바뀌고, 해수로만 3년째를 싸워 왔는데도 이들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휘날리는 만장
오전 집회가 끝나고 조합원들이 잠시 쉬는 시간 동안 천막이 있는 공장 앞에 갔다.
만장이 다시 휘날리고 있다.
지난 1월 상경투쟁 이후 중재위가 꾸려지고 간접 대화에 들어가면서 2월10일, 조합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1년여 기간 동안 정성스레 달고 지켜온 만장과 현수막 등의 조형물을 철거했다.
조형물이 철거되자 사측에서는 담벼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컨테이너를 치워버렸고, 얼마 동안 공장 앞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왔다.
다만 회사 안에 담벼락을 따라 쳐져 있는 날카로운 철조망이 아무 일도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장이 다시 걸리고, 오늘은 고공농성의 여파인지 회사 안에 전경들까지 투입되었다.
정문 앞에는 평상까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햇볕을 막는 그물망까지 쳐져 있다.
가끔 조합원들이 거기에서 회의도 하고 쉬기도 하는 모양인데, 회사에서 딱히 반응을 보이질 않는 모양이다.
역시 비정규직인 청소하는 노동자에게 살짝 물어보니 “치웠다간 큰일 나게요.”하며 천막쪽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수년을 일해 왔기 때문에 그간의 과정을 다 지켜보았다는 그는 “안타깝다"면서 "우리도 매일 치우느라 힘들다”는 말만을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회사 앞을 지키는 용역 한명이 내게 다가와 뭐하냐고 묻는다.
못 보던 사람이 와서 왔다갔다 하며 사진을 찍는 것이 신경 쓰이는 눈치다.
취재 온 기자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동안 이 앞을 다녀간 기자들만 해도 숱할 것이다.
이제 회사도, 하청지회 조합원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무덤덤해졌다.
웬만한 행동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조형물이 치렁치렁 하고 락카칠로 범벅이 된 회사 앞에 서 있는 원청 노동자들의 모습도 크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폐쇄된 ‘사랑의 쉼터’
“사랑의 쉼터 폐쇄 안내 정문 사랑의 쉼터를 일시폐쇄 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회사가 최근에 보인 반응 중 가장 중대했던 것은 정문 앞에 있는 ‘사랑의 쉼터’를 폐쇄한 것이리라.
조형물 철거 이후 폐쇄 중이었던 화장실이 있는 외부인들을 위한 공간 ‘사랑의 쉼터’를 개방했는데, 지난 5월1일 정문 진격투쟁 이후 회사가 다시 폐쇄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이에 대해 무덤덤할 것이고, 동진 아저씨는 자주 분노를 표출할 것이다. 청주 공장이며 서울 사무소 등 하청지회 조합원들이 가는 곳마다 건물 출입을 막고 화장실을 못 쓰게 할 때마다 아저씨는 “내가 정말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지 묻고 싶다”며 분노했다.
‘사랑의 쉼터’ 폐쇄에 대한 조합원들의 반응은 정문 앞에 간이화장실을 설치한 것이었다.
설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날씨가 덥다보니 냄새가 심하게 난다.
우리처럼 자주 빠지는 사람은 쓰질 않아
다들 송전탑으로 가서 3명의 조합원들만이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6동이나 되는 천막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없는 천막을 침낭 몇개와 장기판이 지키고 있다.
언제였을까. 이 6동의 천막이 비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그런 날도 있었을 것이다.
“장기투쟁이여.” 천막 안에서 장기를 두다가 웃으며 싱거운 한마디를 하던 한 조합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려는 조합원의 식사를 방해하며 천막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창기에 간부를 하기도 했다는 그는 “다른 조합원들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몇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투쟁이 이렇게 길어지자 자신이 가입을 권유했던 조합원들에게 미안한가 보다.
그는 한꺼번에 7~80명이나 되는 조합원들이 떨어져 나갈 때도 있었다는 얘기를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많은 조합원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밤에 일을 나간다.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과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의 선택 폭은 그리 넓지 않다.
건당 야간 대리운전이나 하루에 2~3시간 잠을 자며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6시까지 꼬박 일을 해야 백만원 정도를 벌 수 있는 택배일, 한달 5~60만원 정도 받는 야식배달 등이 그것이다.
그마저도 평일날 어려운 사람은 주말에 노가다라도 나가야 한다.
상경투쟁이든 지역에서 하는 투쟁이든 늘 빠지지 않고 열성적으로 하는 만수 아저씨는 늦겨울, 천막에서 만났을 때 지난밤에 건당 5천원짜리 대리운전 일을 하고 왔다고 했다.
“1건 할 때도 있고 많으면 4건도 하는데, 일이 없더라도 거기 가 있는 게 편해. 잘 되는 업체에 가면 좀더 받을 수도 있는데, 우리처럼 자주 빠지는 사람은 쓰질 않아.” 몸살이 났는지 연신 식은땀을 닦아내며 천막을 지키고 있던 만수 아저씨.
겨울 상경투쟁 때, 딸이 용돈 하라고 5만원을 주었다는 얘기를 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던 그는 오늘은 송전탑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힘내라”는 말조차 못 하겠다
“와이프한테 들볶인 지 몇달 됐다.
1년 될 때까지는 와이프도 가끔 투쟁하는데 나오고 그랬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 가니까 요즘은 할 만큼 했으니 그만하라 한다.
예전에는 뭐라고 하면 할 말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할 말도 없다.
그냥 ‘알았어’하고 밖에 담배 피러 나온다.”
이제는 전경만 쳐다봐도 질린다고 천막을 지키던 한 조합원이 손사래를 친다.
1년6개월, 그동안 병원 신세 안진 사람이 없고 빚 안진 사람이 없다.
그 사이 신용불량자가 된 조합원도 있고, 집에 딱지가 붙은 조합원도 있다.
영양실조로 쓰러졌던 조합원도 있고, 와이프와 별거를 하고 있는 조합원도 있다.
신용불량자가 되기 직전에 마트에 가서 먹을 것을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는 조합원도 있었다.
“작년까지는 조합원들을 만나면 ‘수고하신다’, ‘열심히 하시라’는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조합원들한테 ‘힘내라’는 말조차 못하겠다.
병원에 있다보니 건강 상의 이유로 오는 조합원이나 조합원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영양실조로 왔던 분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아이들도 성장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마음이 아프다.
내가 경험해 본 싸움이라면 끝까지 싸우면 이길 거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싸움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나는 정규직이고, 일터에서 쫓겨난다 해도 벌어둔 게 있기 때문에 이 분들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안해서 말도 못하겠다.”
이 투쟁의 초창기부터 연대해 왔던 충북대병원 신선화 지회장을 저녁 촛불문화제에서 만났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싸움이 우리들 모습일 수 있다"면서 "지역 노동자들에게 많이 알려 내고 승리하는 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의의 발언을 잊지 않았다.
다 아시잖아요?
“어떻게 해서 노조를 하게 되셨나요?”
“월급은 얼마나 받으셨나요?”
“어떤 차별을 받으셨죠?”
“어떤 마음으로 투쟁을 하고 계신가요?”
투쟁하는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하게 되는 이런 질문들은 하이닉스 조합원들처럼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에게는 던지기 참 뻘쭘하고 미안한 것이다.
이런 뻘쭘함과 미안함을 무릅쓰고 질문을 던지면 조합원들의 처음 대답은
“다 아시잖아요?”
“홈페이지에 가면 다 있어요.”
“오래 되서 생각도 안나요.”
“그냥 해요.”
“인터뷰 너무 많이 해서 이제 그만 할래요.”
“본대로 쓰면 되지. 뭘 물어봐!” 등등이다.
그런가 하면, “얼마나 다니셨어요”라고 물을라치면 입사할 때 얼마, 나오기 전에 얼마, 아이는 몇명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술술 얘기해주는 조합원도 있다.
일년반 동안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다 보니 이젠 기자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지도 ’척 보면‘ 알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들은 기자들이 어떤 때 오는지, 어떤 때 오지 않는지, 어떤 얘기를 해야 하고, 어떤 얘기를 하면 안 되는 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탓하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일터에서 쫓겨나 길바닥에서 5백일 넘게 투쟁을 했는데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고 기자들은 3년째 똑같은 질문을 한다.
목숨을 걸고 싸워 얻어낸 도지사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더 싸워야, 얼마나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읊어대야 세상은 움직일 것이며 이들은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편집자 주>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써 500일을 넘어섰다.
불법파견 판정, 사내하청노조의 끈질 투쟁 그리고 도지사의 중재에도 노동자들의 복직요구를 외면하고 있는 하익닉스-매그나칩. 지난 5월17일, 사내하청지회는 높이 37미터, 15만4천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에 올랐다.
르뽀작가 연정씨가 이들의 외롭지만 그치지 않을 싸움을 <매일노동뉴스>에 전해 왔다.
이 르뽀는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연재될 예정이다.
연정 르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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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지않고 죽지않고 일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