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시 반부터 비정규직 권리입법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에 참여하였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안을 반드시 저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겨울, 차가운 물대포를 맞으며 집회자리를 지켰지만, 마음 속에서는 계속해서 무언가 허망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집회, 선봉대도 나오고, 죽봉으로 강도 높은 투쟁도 하고 그랬다. 또 폭포수처럼 내리는 물대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집회대오는 꿋꿋하게 집회장소를 지켰다. 하지만 지금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계속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뭔가 뚜렷한 투쟁목표가 없이 갈팡질팡 하는 상황같다는 말이다.
우선 이렇게 된 데에는 투쟁을 하고 있는 우리들 내부에 개념이나, 말에 대한 혼란이 있어서일 것이다. 최초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은 단병호 위원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에서 제출했고, 이후 정부에서 완전히 새로운 안으로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제출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정부안의 내용이 비정규직을 양산화하고 일반화하는 법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된 투쟁을 하면서 권리보장 법안과 정부의 개악안이 혼재되어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개악이 된다고 하는데, 입법쟁취를 하자고도 하니 혼란을 느끼게 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투쟁이 “권리보장 입법쟁취”라는 목표와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 개악저지”라는 목표가 뒤섞여서 투쟁이 진행되었다.
나는 당과, 정부가 각각 비정규직 법안을 제출하였을 때 어느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전무, 아니면 전부라는 식의 투쟁을 전개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투쟁은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듯이, 이번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된 투쟁도 지금은 명쾌한 목표를 세워야하는 판단의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열린우리당은 기간제 사유제한 문제나 파견법 부분 등 핵심적인 쟁점에 대해서 확고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열우당 이목희는 사유제한 등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즉 열우당은 정부안대로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인지, 종부세와 관련해서 한나라당이 국회 불참을 하면서 이번 회기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차기 회기로 넘어간다고 해서 상황이 변화할 것 같지는 않다. 즉 연내 입법이 이루어진다면 정부안이 관철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투쟁기조는 이미 “권리법안 연내 입법”이 아니라 “비정규직 법안 개악 저지”로 가야한다. 정부의 개악안을 막아내면서 당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것은 묘기에 가깝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지금은 정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방식으로 가야만 한다.
다시 집회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집회에서 허망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무래도 투쟁사를 했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의 발언 때문이었다. 열우당의 개악기도를 저지하는 것이 중요해진 이 마당에, 권영길 비대위원장이나, 서비스연맹 위원장(당 비대위원이라고 한다)은 한나라당 정신차리라는 말을 하면서 열우당은 민주노동당과 함께 공조를 해야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나 법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합의되었고 몇몇 쟁점만 남았다는 취지의 발언(구체적인 발언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그 핵심은 이것이라고 들었다)을 하였다. 이 발언들을 들으면서, 두 분 모두 지금 상황을 상당히 밝게 보고 있는데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 안에서 이야기가 그렇게 잘 되고 있으면 오늘 집회에 참여한 민주노총 조합원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국회에서 논의가 더 잘되게 하기 위한 압박용 시위를 하고 있는 상황인가! 오히려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몸소 느끼고 있는 것은 이것보다 더 심각하고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일 터이다.
한국노총에서 정부안을 대부분 수용하는 수정안을 제출하면서 정부의 품안으로 기어든지 며칠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당은 우선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처리하자는 식의 단계적 입법을 처방하였다. 오늘은 “연내입법+ 차별시정(금지)’의 1차 목표를 완결 짓고 ‘기간제 사용의 사유제한의 도입이라는 기본적 원칙을 지키는 선에서 사유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판갈이에서 인용함)하였다. 이미 노동운동을 배신하고 정부쪽에 붙어 버린 한국노총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연내 권리보장 입법을 쟁취하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부의 개악안 저지에 집중하지 않고 정부․열우당안과 당의 안을 절충하는 것으로 어느덧 밀려가고 있는 것이, 지금 당이 취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은 당의 안을 일부 수정하여 비정규직 권리를 확대하는 법을 정부와 열린우리당과 합의하여 관철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만약 당이 사태를 냉정히 보지 못하고 이에 연연하다가는, 정부의 개악안을 저지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지 못하고 투쟁에 실패할 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된 어떤 타협안 제시도 지금 시점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지금 시점은 권리입법의 달콤한 꿈에 빠져서는 “개악안 통과”를 눈뜨고 보게될 상황이다. “비정규직 법안 개악저지”를 내걸고, 정부안에 대해서 목숨걸고 막아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온몸으로 정부안을 막아내자! 이것만이 당장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투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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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당이 “비정규직 법안 개악저지”로 투쟁목표를 분명히 할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