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522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당의 위선적인 태도를 보며
글쓴이 : 정방기
등록일 : 2007-11-20 20:20:22
조회 : 118
토요일 있었던 당 중앙위원회는 내년 18대 총선에서 비정규직노동자에게 비례대표 2번을 준다는 결정을 했다. 11월 초로 기억하는데 권영길 후보가 ‘비례대표 후보 비정규직 할당’을 제안한 이후 최고위를 거쳐 17일 중앙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이 전격적으로 가결된 것이다. 물론 18대 총선에 한해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어느 중앙위원이라 해도 비정규직 할당 자체를 반대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이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이렇게 중차대한 안건이 후보가 제안한 이후 불과 보름여 만에 일사천리로 처리된다는 게 황당할 뿐이다. 이 결정과정은 그 동안 당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취했던 포지션과도 잘 조화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진정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위선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안건을 통과시킨 중앙위원들 보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비정규직 문제에 당이 보다 적극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갖추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중앙위원들은 물론 당원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이 결정으로 얻고자하는(?) 효과가 무엇인지는 누구든 다 알 법하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반응이 반전되고 당 지지율이 상승하리라고 보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발상이다. 왜일까? 우선,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도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현 상황에서 이런 결정은 선심성 짙어 보이는 태도 정도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특히 힘겹게 투쟁해온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이 소식에 그저 반가워할 것만 같지도 않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당사자들은 초기 민주노동당에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지만, 그 동안 굵직한 몇몇 비정규직 투쟁에서 당이 보여준 태도로 크나큰 실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를 걸고 사생결단의 투쟁을 전개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에서 역사적인 획을 그을 중대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비정규직투쟁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보내며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현대자동자 정규직노조의 태도로 인해 곤경에 빠졌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남한 최대의 실세노조인 이들 정규직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며 사태를 방치할 뿐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집중집회에 깃발도 가져가지 못하는 치졸함을 보였다. 결국 싸움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자동차 4사에 공히 걸려있던 불법파견 문제는 당시 노동부의 판정까지 얻은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다시는 해보기 어려운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치러진 울산북구 재선거는 말 그대로 참패였다. 투쟁하는 비정규직이 당에 대하여 등을 돌린 탓이 컸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걸 원망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악법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비정규직법이 개악되기까지의 당의 대응도 새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원내 입법활동에 매몰되어 싸움을 그르쳤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미 협상 자체가 될 수 없는 조건에서 ‘권리보장입법’의 취지를 살려보려고 협상에 집착했던 일이나, 2005년 말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하여 ‘사유제한’이니 하며 위험천만한 ‘수정안’까지 내밀며 투쟁에 혼선을 초래했던 일들이 그렇다. 특히 노사관계로드맵을 국회에서 ‘합의’해준 사건은 비뚤어진 당 운동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고, 그 시간 국회 담장 바깥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강행처리’라고 분노한 노동자들이 피터지는 혈전을 벌여야 했다.
이런 일들은 일부 의원들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모두 민주노동당이 저지른 과실이다. 애초부터 소수 의원들로 법안 흥정 자체가 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협상에 골몰하며 노동자들에게 기대심리를 심어주면서 법 개악을 저지하는 전선을 구축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원내 협의과정에 시종일관 함께 하며 뒤늦게야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법안통과를 막겠다는 의원들의 행동은 일관성이 없었고 노동자 대중을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 숱한 혼란을 야기한 채, 저항 한 번 제대로 조직해내지 못하고 통과된 악법이 지금 노동자들의 목을 죄여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당 안팎을 들썩이게 했던 한국노총에 대한 사과는 당 운동의 근간은 물론 어용과의 투쟁으로 성장해온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부정하는 심각한 배신행위에 해당된다. 로드맵과 비정규직법 등 한국노총이 자본과 결탁해 도모한 악법으로 고통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노총에 사과공문을 전달한 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과는 악법 도입을 합의해준 한국노총에게 당 지도부가 함부로 면죄부를 주게 된 동시에, 고통에 내몰려 악법에 저항하는 수많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요구를 일거에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 안팎에서 빗발치는 항의에 밀려 뒤늦게 사과를 철회했지만 여전히 당 지도부가 한국노총과의 정책연대에 미련을 털어내지 못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조금이라도 개선된 게 없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오류들만 남겼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간 과오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전체 노동자들이 겪을 고통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제대로 못한 만큼 그 책임이 당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나간 과오를 그대로 덮어둔 채 비정규직 할당을 결정하는 것은 좋게 보려고 해도 ‘위선’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이번 중앙위의 결정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과실을 일거에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이번 결정으로 당이 비정규직 투쟁을 제대로 못한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 비정규직 할당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거니와 당 차원의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생색내기’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최소한 그간 당이 비정규직 투쟁을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었을 때 이런 결정은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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