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친구야>라는 TV 프로그램의 연말특집을 봤다.
어릴 적 동창생들이 나와서 출연자의 어린 시절에 얽힌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출연자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 동창생들을 찾아내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이 어릴 적 고생했던 이야기나 부모님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때면 진행자들도 눈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고 시청자들도 같이 콧등이 시큰해진다.
나도 같이 눈물을 훔치다가 “저 사람이 가족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 때문에 울어 본 적도 있을까?
경찰 폭력으로 사망한 농민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에도 관심이 있을까?”
그런 자각과 함께 얼른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지독한 직업병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아무래도 ‘울음’보다 ‘웃음’을 보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영화배우 박준규의 초등학교 동창생은 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준규가 아파서 학교에 오지 못한 날이 있었어요.
학교 끝나고 준규 집에 갔더니 준규 아버지(영화배우 박노식씨)가 집에 계시더라구요.
절더러 ‘너, 인마, 공부는 잘 하냐?’고 물으시더라구요.
저는 ‘공부 잘 못합니다. 준규 친군데 다 똑같지요. 뭐.’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시청률이 가장 높다는 공중파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학교 다닐 때 시험 점수 좀 잘 받았다고 으스대는 것은 유치하고 부끄럽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짓이 될 수밖에 없다.
방송 일을 하는 후배가 몇 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프로그램 잘 만들어서 대박 터뜨리는 PD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한 사람이 아니라, 잘 놀아본 사람이야.” 그런 세상에서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좀 잘했지만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공부 잘 못했다”는 것보다 훨씬 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요즘은 그런 세상이다.
대학교 은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동창생의 아버님이기도 하신 분이다.
은사님의 아들이자 고등학교 동창생인 친구를 어언 30년만에 빈소에서 만났다. 구렛나루와 턱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동창생은 “벽오동 심은 뜻은... 와뜨뜨뜨뜨...”를 목청껏 부르던 가수 김도향처럼 넉넉하고 보기 좋은 풍채와 인상으로 문상객들을 맞았다.
검은 색 상복조차 썩 어울리게 코디한 패션처럼 느껴지는 것이 한 눈에 보기에도 나하고는 ‘노는 물’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일주일에 몇 건씩이나 받을 만큼 이제 나이를 먹은 동창생들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병원 영안실에 왁자지껄 모여 “그동안 사느라고 바빠서 못 만났으니 앞으로는 자주 만나고 살아야지. 그래야 사람 사는 꼴이지...” 어쩌구 하면서 밤 새 술잔을 기울이기 마련인데 그런 동창생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대학교 동기들한테 받기 전에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먼저 했어야 마땅한데 그런 연락도 없었다.
소위 일류, 이류, 삼류를 따지던 시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동안을 같이 다녀서 흔히 말하는 ‘아삼육’이기 마련인데 그 동창생 친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야, 왜 고등학교 동창 놈들이 한 명도 안 보이냐? 벌써 다들 왔다가 갔냐?”
내가 물었을 때 그 친구는 손바닥으로 자기 무릎을 치며 서슴없이 답했다.
“내가 그때 낙제했잖냐.”
맞다.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백 명을 넘겨 보내야 한다고 조회시간마다 교장 선생이 교단에 올라서서 “올해에는 반드시 백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시대... 반 편성이 아예 ‘서울대반’, ‘연고대반’, ‘기타대반’ 이렇게 돼 있어서 교련시간에 열병분열을 연습하다가 줄이 좀 틀리면 교련 교사가 마이크에 대고 “거기 기타대반! 줄 틀렸잖아. 너희들이 인마, 그러니까 기타대반이지!”라고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야단을 치던 시대... 그 살벌한 시대에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겠다고 우리 학년이 고3으로 올라갈 때 학교에서 80명 가량을 낙제시킨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낙제생이었던 거다.
그 낙제생에게는 중고등학교 5년을 같이 다닌 친구들도 ‘동창생’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고 잠깐 같이 공부한 1년 후배들과 동창생이라고 어울릴 수도 없었던 거다.
시험 점수 좀 못 받았다는 이유로, 5년 동안 쌓인 학창 생활의 인연을 몽땅 빼앗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으로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나는 서울대학교에 못 갔다.
역시 같은 고등학교 후배인 처남은 직업이 목사인데 교회에서 설교할 때 가끔 내 이야기를 한다.
"하 집사님이 당시 서울대에 백 명 가까이 보내던 고등학교를 다녔으면서도 지방대학교를 갔으니, 한 마디로 고등학교 때 거의 반에서 꼴찌했다는 얘기죠." 처남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그렇게 흉 볼 수 있는 이유는,,,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실제로 그렇게 공부를 못한 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에서 거의 꼴찌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 집 아이들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학급 60명인 반에서 시험성적 59등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60등 꼴찌를 했던 녀석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지금도 세브란스병원 외과과장으로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서울대반이었으니까... 서울대반에서 꼴등을 해도 다른 반에 가면 거의 1등이었으니까...
당시 서울대학교는 전과목 본고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려면 음악, 미술, 체육 시험까지 모두 봐야 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전과목 고사를 치렀다.
이른바 ‘주초고사’다.
다른 학교들은 모두 ‘주말고사’였는데 우리 학교는 일요일에 학생들을 놀지 못하게 하느라고 유독 ‘주초고사’를 봤다.
일주일 동안 공부한 내용을 시험범위로 월요일마다 전과목 시험을 보았으니, 일요일에 공부 좀 열심히 하면 1등, 이웃 인일여고 학생들과 관악산 등산이라도 다녀오면 꼴등... 그랬다.
그런 살벌한 시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낙제를 했지만 지금 한결 넉넉하고 여유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나, 힘들게 공부해 명문대를 나왔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부동산 불리는 일에만 열심인 친구나, 60명인 반에서 59등을 해봤던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그 살벌한 노력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들인가...
대학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다른 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노동교육이 얼마나 잘 시행되고 있는지 공부한 적이 있다.
독일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노사관계에 대해 “가족 관계를 제외하고 인간이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가족생활과 직장생활이 가장 중요한 생활 요소이니 가족관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노사관계일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보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직장인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 중요한 노사관계에 대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
독일 초등학교에서는 ‘모의노사교섭’이 일상화된 수업 내용으로 자리 잡혀 있다.
한 교과서를 보니 학생들이 모의노사교섭을 여섯 차례나 수행하도록 편성돼 있더라... 그런 설명도 했다.
중간시험에서 나는 “독일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서 정의한 바, ‘가족 관계를 제외하고 인간이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이0라고 묻는 단답형 문제를 냈다.
대학생들에게는 유치할 정도로 쉬운,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점수를 주기 위해서 낸 문제였는데 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쓴 학생들이 많았다.
“친구 관계”
다른 대학에서 나와 같은 과목의 강의를 하는 홍주환 교수에게 묻고 싶다.
이 답을 맞게 처리해야 하나?
친구는 역시 위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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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친구야! (하종강 노동과 꿈에서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