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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8 17:1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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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운 |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깊은 뜻 (하종강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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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8.15 특사로 나온 박노해 시인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실패하면 우리 사회는 87년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굳이 87년을 분기점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자랑스러운 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울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현대그룹 최초로 ‘현대엔진’에 노동조합의 깃발이 꽂히면서... 삽시간에 태화강 둔치에 5만명의 노동자가 모이면서... 며칠 뒤, 공설운동장에 10만명의 노동자가 모이면서... 2박3일 동안 울산이라는 도시 하나를 노동자들이 완전히 점령하다시피 파출소와 동사무소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렵 서울 광화문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는 사람이 울산에 10만명의 노동자가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허겁지겁 울산에 내려가 저녁나절에 울산에서 활동하는 친구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오늘 10만명이나 모였었다는데, 뭐 나온 자료 있으면 좀 줘봐.”
예나 이제나 ‘자료’부터 찾는 게 배운 사람들의 못 되먹은 속성입니다.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하지 않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료 몇 개로 실태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폐단은 정부의 산하기관 감사에서 거의 극치를 이룹니다.
예전에 문교부가 교사들의 잡무를 덜어준다면서 각종 서류의 폐지를 지시했다가 두어달 후에 감사하러 나와서는 그 서류들부터 보자고 했다지 않습니까?
내 말을 듣고, 한 친구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유인물을 한 장 꺼내서 보여 주었습니다.
조악한 글씨로 ‘우리의 요구’라고 크게 써진 제목 밑에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구호가 모두 21개나 적혀있었습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그런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저 ‘어떻게 해달라!‘는 요구 사항만 1번부터 21번까지 스물한 개가 적혀 있었습니다.
요즘은 조합원이 50명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노동조합도 홍보물을 그렇게 유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10만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발표한 홍보물이 그 수준이었습니다.
그 21개의 요구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무엇이었을까요?
십수년간의 개발독재 밑에서 지나친 저임금에 시달려 왔으니 임금을 몇십 퍼센트 인상하라! 그런 것이었을까요?
물론 임금 인상 요구도 있었으나 그것은 순번이 저 아래 10번쯤이었습니다.
잠시 각자 맞는 답을 생각해 봅시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때로 지나치게 무식해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쳐도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줘야만 알아듣습니다.
당시 5만명의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첫 번째로 외쳤던 구호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서툰 글씨체로 맨 처음에 적혀 있었던 구호...
그것은 바로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달라!”였습니다.
그 뒤에 ‘(두발자유화)’ 이렇게 괄호 안에 부연 설명까지 되어 있었던 그 홍보물의 글씨체를 저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10만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외쳤던 첫 번째 구호가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 달라!”였다니... 대기업일수록 더욱 그랬습니다.
노동자들이 머리를 자기 마음대로 기를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몇 센티미터 이하’ 이렇게 회사가 정해 놓으면 해고당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것보다 더 길게 기를 수 없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겠으나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럼, 두 번째 구호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두발자유화’ 뒤에 이어지는 구호는 당연히 ‘복장자율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출퇴근시만이라도 사복을 착용하게 해달라!”는 것이 두 번째 요구사항이었습니다.
그 뒤에 ‘(복장자율화)’ 이렇게 토를 달고 있던 그 구호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지금은 노동자들이 작업복 입기를 창피해하지 않습니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입고 다닙니다.
현대자동차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울산의 어느 수퍼마켓에서도 외상을 주고, 포항제철의 황토색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그 회사에 다니는 것이 평생 소원인 사람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제조업체 생산직 노동자들은 ‘공돌이’ ‘공순이’ 소리를 들으며 기 죽어 살 때였습니다.
출퇴근 시간만에라도 자신이 노동자인 것을 숨기고 싶어했습니다.
“안전화 신고 쪼인타 까지 마라!”, “주머니에 손 넣고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눈물겨운 구호도 꽤 높은 순위로 적혀있었습니다.
십수년간의 개발독재가 한국의 노동자를 그 지경으로까지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87년 이전의 한국 노동자는 지금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한국의 노동자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87년부터였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점심을 회사 식당에서 먹을 수 있게 되거나,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스스로 인간인 것을 잠시 잊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은 비로소 그때부터였습니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다고 관리자로부터 뺨을 맞거나, 말끝마다 육두문자가 들어가는 무수한 욕을 배가 부르도록 얻어먹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나 집시법으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목줄이 뻣뻣해지면서 골방에 숨어 숨 죽여 노동조합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 역시 그때부터였습니다.
87년 그 무렵, 나는 노동운동과 관련된 일을 해 온지 꽤 오래 됐을 때였지만 ‘생산직 노동자가 진짜 노동자다’라는 생각이 싹 가시지는 않아서, 사무직, 서비스직 노동조합에 갈 때에는 심드렁한 마음이 전혀 없지 않았습니다.
나를 오라고 부르면, 가기는 가면서도 ‘자기들이 언제부터 노동자라고... 노동자라고 하면 때 절은 작업복에 피땀 흘리며 일을 하는 기름밥 노동자라야 진짜 노동자지.’ 하는 생각으로 떨떠름한 느낌이 전혀 없지 않았습니다.
87년 8월이었나... 우리나라 최초로 어느 백화점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며 나를 불렀습니다.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간 나는 강의 첫머리에서 사람들에게 질문부터 했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노동조합 생기고 뭐 하나라도 달라진 게 있어야 노동조합이 좋은 거 아니겠소?
여러분이 대답하지 않으면 저도 강의 안하고 그냥 가는 수가 있습니다.”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자꾸 대답을 재촉하자 맨 뒤에 앉아 있던 여성이 일어서더니 말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일을 합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려도, 나에게 인사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니까, 나한테도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함께 농성을 했던 조합원들도 반갑게 인사하고, 회사의 관리자들도 인사치레 한 마디씩은 하고 내리더군요.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나는 인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받아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입니다.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하루 종일 일해도 따뜻한 인사 한 마디 받지 못했던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래서 인간 대접받도록 하는 것, 그것이 노동조합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몇 푼 더 받자고 하는 것이 결코 노동조합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동안 저는 목이 잠겼습니다.
그 동안 제가 가졌던 부끄러운 편견에 대한 뼈아픈 참회였습니다.
그 후에도 한 동안 그 일만 생각하면 습관처럼 목이 잠겼습니다.
87년을 분기점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졌습니다.
87년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시다.
식당의 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문 앞에 모여서 “의샤!” 한 번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었습니다. 당시 공단에 가 보면 줄줄이 늘어서 있는 회사들마다 차례로 ‘농성’ ‘파업’이었고 그 사이에 가끔 ‘바보 같은’ 회사만 하나씩 정상 조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가 보면 그 회사 역시 파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민정부 말기의 총파업 투쟁 당시 가장 열기가 고조되었던 1월 중순 경 전국적으로 동시에 파업에 참여한 사업장이 1천 개 남짓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열기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있는 것을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명언과 함께, 국회에서 자신들이 통과시켰던 법률을 스스로 취소하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천 개 남짓 사업장이 파업을 해도 그 정도인데, 87년에는 동시에 쟁의에 돌입한 사업장이 무려 3천6백 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일찍이 다른 나라에 없었습니다.
해방 이후 40년 세월 동안 만들었던 노동조합과 거의 같은 수의 노동조합이 몇 개월 만에 만들어졌습니다.
머리띠를 묶어 맨 수만 명 노동자들의 모습과 휘날리는 수백수천의 깃발과 현수막의 물결이 두 달 내내 TV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한국전쟁이나 임진왜란의 들끓는 분위기도 87년 7, 8월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바뀌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겠지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비례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긴 역사 속에서 불과 87년 이후부터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없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해결사’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사병’이라고 부르는 깊은 병이 우리 노동자의 정서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노동조합은 해결사가 아니라 그 본래적 태생이 ‘어렵고 험난한’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노조 간부들을 만나면 노동조합 활동하기가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몇 년 전, 포항지역 노조간부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 임기가 끝나면 다시는 노동조합 간부는 안 하겠어. 노조 간부 1년 동안 남은 것이라곤 위장병하고 빚 200만원밖에 없다구. 매일 회의다, 교육이다, 연대모임이다, 뭐다 해서 집에 늦게 들어가지...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지... 회사에서는 팍 찍혀서 죽어라 뛰는데 조합원들은 안 따라주지... 이 짓을 누가 하겠느냐구.”
모두들 동의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았던 다른 노동조합의 간부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해. 현장에 가서 팍 박혀 있어봐. 자꾸자꾸 또 하고 싶지. 나 보라구. 결국 5년만에 다시 올라왔잖아.”
내려가기도 하지만, 올라오기도 하는 것... 패배하기도 하지만, 승리하기도 하는 것... 그게 노동운동입니다.
역사학자 박준성 씨의 말에 따르면 “승리할 때까지 패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노동운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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