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 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사무실에 온 지는 두 달을 갓 넘겼더군요.
'더군요'라는 어미를 쓰는 이유는 제 무심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무실에 버티고 있기보다는 일이 있어서 일하러 나가건, 없어서 놀러 나가건 외근이 잦은 직업인지라 한 팀이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술자리에서 운 좋게 합석하기 전까지는 스크립터와 제대로 된 말을 섞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어느 날 아침 당신이 23층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얗게 된 머리 속은 아직도 색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소식을 전한 후배 역시 내가 당신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리라 여겼던지 "선배 뒤에 앉아 있던 스크립터"라고 지칭했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내 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거리로는 당신의 키만큼도 미치지 못한 거리에서 당신은 전화를 하고 노트북을 두드리고 제보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를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인연을 가졌던 다른 팀에 있는 동기가 "아주 또랑또랑한 사람이니까 잘 챙겨 줘라."고 얘기해 왔고, 나도 과장스런 몸짓으로 두 팔을 벌리면서 "웰 컴 투 SOS 지옥"이라고 웃으면서, 지옥(?)에 입성한지 한참 된 선임 PD의 입장에서 상기된 얼굴의 당신과 부드럽지만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지요.
그리고 나는 등을 돌려 인터넷 서핑에 열중했고 당신은 내 바로 뒷자리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슬프고 갑갑한 것은 당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곳보다 더 열악한 곳에서도 열심히, 패기있게 일했다고 들었고, 누구처럼 어둠이 깔린 얼굴도 아니었고, 또 아무개처럼 술을 못먹어서 술자리에서 핀잔도 듣지 않았으며, 모모씨처럼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서 선배들에게 융단 폭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뚱딴지같은 기자의 억측처럼 왕따도 전혀 아니었고 가끔 발생하는 상황처럼 일이 숨에 닿도록 몰려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맡았던 첫 프로그램을 앞두고 불안해 하고 있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던 스크립터 00씨가 퇴근 후 다시 회사에 나와서 새벽까지 함께 있었다고 했지요.
그리고 택시를 타는 그녀를 배웅한 뒤 당신은 회사로 들어갔고 다시는 우리 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헤어질 때도 당신은 웃고 있었다고 했지요.
그 짧은 시간 당신에게 닥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당신과 나 사이의 1미터 거리를 영원의 간격으로 바꿔 놓았던 겁니까.
당신이 일하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하얀 국화 꽃다발을 보면서, 그 달갑잖은 향기가 코끝을 무자비하게 찔러댈만큼 가까운 내 자리에 앉아서,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유의 꽁무니를 쫓다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무의미함을 문득 깨닫습니다.
어쩌면 나의 죄는, 그리고 우리 팀의 책임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우리에게서 나왔든, 당신 속에서 삐져 나왔든, 이런 엄청난 결과를 낳은 원인을 알 수 없어요 고개를 내젓고 있는 자체가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고민과 아픔과 통증을 결국 이해하지 못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혐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은 지극히 낮은 곳에서, 녹녹한 발디딤판 하나 없이 뛰어올라야 했고, 까진 무릎의 아픔을 홀로 삭여야 했고, 비틀린 발목을 쉬쉬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한 척 웃어야 했을 것이고, 자유로워 보이나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프리랜서의 허공 속으로 스스로를 띄워야 했습니다.
당신의 선배들이 그래왔듯이, 당신의 동료들이 그러고 있듯이 말입니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그러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현실로, 책임은 능력에 관계없이 다대하나 권리는 능력에 따라 향유하는 것이 마땅한 정글의 모습으로 세상은 당신을 맞이했겠지요.
당신은 결코 특수하여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정글에서 당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당신과 같은 선택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니까요.
방송계 뿐 아니라 이 나라 전체에서 마치 증식력 좋게 퍼져 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선배들도, 그리고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한 채 등 돌리고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저 자신도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 공포를 이겨내는 사람은 사실 드뭅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잊어버리냐의 문제겠지요.
이제 정글은 당신의 터전이 아닙니다.
당신을 괴롭혔던 그 모든 것들을 말끔히 잊고 좋은 곳에서 이승에서 못다한 당신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가끔은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 흘린 많은 이들의 꿈 속에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그들의 등을 두드려 주기를 소망해 봅니다.
또 가난한 지갑 사정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는 항상 부유한 선배였다는 당신의 넉넉함을 남은 사람들에게 뿌려 주고 가기를 염치없이 요청해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당신의 가족 이외에는 당신의 죽음에 가장 슬프고 가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고 뜻밖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당신의 작가 선배들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기를 바랍니다.
내 보잘것없는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당신의 선배들은 당신을 벼랑으로 몰만한 깜냥도 배짱도 품성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고, 그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안녕히 가십시오. 스물 셋..... 생때같은 나이로 접힌 당신의 모습은 이제 내 머리 한켠에 묻어 두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내 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당신의 명복을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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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뒤에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