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 연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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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1 17:38:59
류재운
위원장님은 해결사? [하종강 노동과 꿈 펌]
토요일 밤이었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서울의 거리는 관능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온사인의 조명은 더 화려해보였고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들의 불빛은 마치 홍등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황색 점등들을 기다랗게 걸어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겐 어떤 외설스러운 열기가 있어 보였다.    
사무실 4층에서 망연히 바라보는 풍경은 늘상 그랬었지만 오늘만큼은 오랫동안 배설을 참아온 사람들이 자유롭게 일탈을 감행하는 토요일 밤이었다.
순간 비릿한 정욕의 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밤이 깊을수록 서울은 배설물들의 거대한 하수구로 변할 것이다.
그는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다 이제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토요일에도 꼬박꼬박 조합사무실로 정시에 출근해 업무를 보면서 자신은 노조활동을 성실히 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자부하고 있었다.
전임자임에도 근태가 개판인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합사무실에서 버젓이 노름을 하다 조합원들에게 신망을 잃은 상근자들이 어디 한 두 명인가?
사람들은 고생했던 시절들을 너무 빨리 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자고로 사람은 근면성실해야 인정을 받는 게 아니던가?
조합사무실의 스위치를 막 내릴 때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 네. 누구십니까?
- 위원장님이세요?
전회기 저편의 사내의 음성이 조금은 다급하고 격양돼있었다.
그는 이 전화가 왠지 불길하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위원장을 오랫동안 하면서 느끼는 감각 같은 것이었다.
- 네. 말씀하세요?
- 여기는 천안공장인데요. 이 영호라고 합니다. 저희 공장 오늘 노조 만들었습니다!
- 뭐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 아니! 위원장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본조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노조를 만들어요?
- 죄송합니다. 저희는 회사에 노조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최근에서야 본격적으로 노조를 띄우려고 준비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이점 양해드립니다.
오늘 퇴근 후 48명이 모여서 노조지부 설립 결의를 했습니다.
월요일 공장 식당에서 보고대회를 하려고 합니다.
- 기가 찰 노릇이네. 지난번 내가 천안공장 방문했을 땐 아무런 말도 없더니 이게 무슨 소리요?
- 사실 저희는 오래전부터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그러면 당연히 위원장이랑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니요?
- 그때는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니까요?
그리고 알았다 해도 우리 조합원들과 일면식도 없었을 뿐더러 전혀 교류 한번 해본 적이 없는 분과 어떻게 이런 일들을 논의할 수 있었겠습니까?
- 답답하네! 내가 원래는 공장 순회를 잘 안하는데도 이젠 공장들도 챙겨야지 하며 내 딴에는 큰맘 먹고 처음으로 내려갔는데….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들도 만나 저녁 먹으면서 이러저런 고충을 들었는데. 그땐 노동조합의 노자도 꺼내지 않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이렇게 위원장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거요?
- 죄송하게 됐습니다. 비밀리에 노동조합을 만드느라….
- 그 말은 위원장도 못 믿겠다는 소리 아니오?
- 그렇게까지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놈의 죄송하다는 말은 집어치워요? 나는 위원장으로서 천안공장 노조를 인정할 수가 없어요!

그는 단호했다.
뜬금없이 지부가 생긴다는 것은, 더구나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든 노조는 위원장으로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쪽 팔리는 일이었다.
회사 관계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지부 하나 만드는 것도 위원장으로서 관여하지 못했다고 핀잔을 줄 것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상급단체의 연맹사람들이나 밖의 사람들은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다들, 왕위원장님! 왕위원장님! 하면서 그동안 떠받들지 않았던가?
그는 이번 일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이제 노조를 갓 만들려는 신출내기들이 아닌가?
적당히 겁을 줘서 위원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고 천안공장 노조를 자신의 영향력 안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수 십 명의 조합원들을 거저 얻는 성과를 올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위원장으로서의 능력을 본조조합원들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고 회사 내 입지도 더욱 공고해지지 않겠는가?
밖에서도 뛰어난 조직운동가로 인정받을 것이다….

- 거듭 말하지만 나는 천안공장 노조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 무슨 말입니까? 어렵게 노조를 만들었는데 고생했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렇게 딴지를 걸어야 되겠습니까?
그게 위원장님으로서 할 소리입니까?
‘어라, 이놈 봐라? 겁을 줬더니 오히려 삐악삐악되네. 가소로운 자식!
노동운동판에서 굴러먹은 짬밥이 얼만데 겁 대가리도 없이 생면부지의 놈이 엉 까네!’
- 기업별 노조에서는 지부설립이야 본조 대의원대회에서 추인만 하면 되는 일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위원장님으로서 직무유기 하는 거 아닙니까?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일단 으름장을 놓고 한발 물러서야겠다고 생각했다.
- 직무유기라니 당신 말 다했어? 위원장과 사전에 일절 협의도 없이 노조 만든 건 잘한 일이오?
그리고 본조는 지금 회사와 임금교섭 중인데 천안에서 갑자기 노조를 떠억 만들어버리면 교섭에 방해가 되는 걸 몰라요?
- 노동조합 만드는 거랑 본조 교섭이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구나 본조는 영업판매직 아닙니까?
- 답답한 소리 하네! 갑자기 공장에서 노조가 만들어졌는데 회사가 교섭에 성의껏 임할 것 같소?
난리 났다고 동분서주 할 게 뻔한데…. 왜? 굳이 이런 시기에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 거요?
본조에서 임금교섭이 끝나면 그때 만드는 게 어때요?
그는 우선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신이 천안공장 사람들을 다독거려 고충처리를 먼저 해결해주고 그 뒤에 자신의 입김으로 노조를 만들어야만 위원장으로서 입지가 더욱 단단해질 것이 아닌가?
-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50대 아주머니들을 어렵게 설득했는데 이제 와서 무작정 기다리라니요?
아마 회사가 이런 사실을 먼저 알아채고 노동조합 설립자체를 방해할 겁니다.
- 그 정도 보안유지도 못하면서 무슨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거요?
- 노동조합을 만드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아주머니들에게 그 불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겁니다.
결의했을 때 곧바로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 차암! 그러면 일주일 정도만 뒤로 미룹시다! 내가 지금 당장 천안으로 내려가겠소.
위원장을 등에 업고 노조 만들어야 힘 받을 수가 있는 것이오.
- 말은 알아듣겠으나 시기적으로 촉박합니다.
- 위원장 말이 말 같지 않소?
- 그 시간동안 노동조합 해보기도 전에 박살납니다! 우리는 우리 일정대로 가겠습니다!
- 이 사람이 성격 급하구먼! 돌다리도 하나 둘 세고 건너라는 말 못 들었소?
지난번 천안공장 노사협의회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제일 큰 고충이 고용불안이라는 걸 들었소.
그거 내가 다 해결해 주겠소.
나아, 20년 넘게 노동운동 해온 사람이오! 사장님도 내말이라면 꿈벅 죽는단 말이오?
- 우리도 여러 번 회사에게 얘기 했습니다.
퇴직자들이 생기면 신규채용 하라고! 그러나 회사는 정규직을 모조리 없애고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심겠다는 계획입니다.
현장에는 오히려 지금 파견노동자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 저지르지 않으면 평생 못합니다!
- 그러니까 기다려달란 말이오? 일주일도 못 기다리겠소?
- 안됩니다. 불붙었을 때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주저하거나 망설이면 모두 끝장입니다!
- 답답하기는! 그렇게 시작해서 만일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지겠소?
노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오? 나아, 그거 하면서 인생 조지는 사람 여럿 봤수다!
위원장이 힘을 실어 줄 테니 일주일만 기다리시오!
- 그 시간동안 노조고 뭐고 다 와해됩니다!
- 이런?…. 당신 마음대로 하쇼!
그는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역정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보고대회 때 오실 겁니까?
- 이 사람이 지금 장난치나? 이 판국에 내가 거길 가야겠소?
가고 싶지도 않고 갈 수도 없소!
- 지부 출정식 때 위원장님이 안 오시면 천안지부 조합원들이 실망할 겁니다.
나중에 저희 조합원들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십니까? 맘에 안 들더라도 오시지요?
후회하게 됩니다!
순간 그는 천안지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모르는 척 하고 있자니 천안 사람들에게 욕만 바가지로 먹을 것이고, 안가자니 본인의 지분도 없는 남의 잔치에 가서 박수치기도 그렇고….
- 내, 연맹 조직국장이나 한번 내려가 보라고 하지요.
당신 말이오? 이런 식으로 노조활동 하는 거 아니오?
지금 회사랑 싸우기도 바쁜데 같은 조직 내에서도 이렇게 의견 조율이 안 돼서야 되겠소?
이래서 우리 노동운동판이 개차반이 됐단 말이오.
나, 원! 노동자는 말이오, 무조건 단결해야 되는 거요?
지금은 처음이라 잘 모를 텐데 내말 깊이 새겨들으쇼. 그리고 앞으로는 본조에 기댈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네들 사고 치면 맨날 뒤치닥거리나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말해 둡니다!
- 보고대회 때 조합원 가입원서 모두 받아서 본조로 보내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인가?
연맹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다 우연히 천안공장에 관한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천안에서 상징적인 비정규직 투쟁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지역의 상근자가 민주노총 중앙과 각 연맹들을 방문하며 연대를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연맹도 찾아와 연대를 호소하며 인사를 나누다가 어디 위원장이라고 소개하니까, 지역의 그 친구가 예전에 찬안공장에서 노조를 한번 만들려고 하다가 총대 맬 사람이 없어서 좌절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연맹 조직국장이 지금도 그런 기운들이 남아있을 줄 모르니 왕위원장님이 한번 내려가서 분위기도 보고 노조설립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들었었다.
그때 만사 제치고 즉각 천안을 갔어야 했는데 설마? 하는 마음과 교섭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이런 더러운 꼴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안 김치공장에서 50대 아주머니들이 드디어 노조를 만든다,
이 XX같은 개름직한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생산직 노조야 아산 공장에도 있지만 쪽수도 몇 명 안 되고 간판만 걸어놓은 노조가 아니던가?
지부장 또한 자신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사람 아니던가?
종종 서울로 불러 회사 임원들과 같이 식사도 시켜주며 친분을 유지하도록 얼마나 자리를 만들어줬던가? 더군다나 평직원을 주임까지 달게 해줬으니 자신의 말이라면 설설 길수밖에…. 어디 그뿐인가?
연맹 회의 때도 가끔 불러 이 동네 분위기가 이런 것이라는 걸 슬쩍 알게 해 주고, 다른 단사 위원장에게도 우리 아산지부장이라고 소개시켜주며 추켜세워 줄 때 얼마나 자신 스스로가 뿌듯했던가?
삼 백 명이나 넘는 조합원을 거느린 왕위원장님이라고 남들이 그래서 부르지 않았던가?
솔직히 위원장도 어디, 다 같은 위원장인가?
세상살이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쪽수가 많아야 대접받는 게 이 바닥 풍토가 아니던가?
아무리 똑똑해도 조합원수가 작으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찬밥 신세밖에 더 되겠는가?
지금껏 연맹에 꼬박꼬박 갖다 준 조합비가 얼만데 그들이 자신을 홀대하면 배은망덕한 놈들이지.
비록 연대집회 같은 건 못 갈지언정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게 얼만데…. 그들도 그런 걸 알았는지 옆구리 찌르면서 연맹 부위원장 하시면 어떻겠냐는 걸, 고사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솔직히 자신이 고사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눈치가 아직까지는 시임하게 부족하지. 쯧쯧…. 자고로 사람은 더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게 아니던가?
자신의 신념대로 지금껏 노조밥 먹으며 남들에게 존경받아 왔는데 마치 빨간 신호등에 걸린 것과 같은 이 기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편안하게 앉아서 볼일보다 갑자기 끊어낸 이 찜찜함은 뭐란 말인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어떻게 수습해야 된단 말인가? 통화한 사내가 자꾸 눈에 밟혀왔다.
신출내기 치고는 뭔가 자신감에 넘쳐 보이는 그 사내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란 말인가?
본사 관리부서에 전화해서 그 사내의 인적사항부터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건 분명 사건이다.
자신을 감쪽같이 배제시키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줄 세우기도 할 수 없는 생산직 노조가 뜬다?
아니, 이건 사고다! 불길한 대형사고….
그는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뒷머리가 뻐근해졌다.
근처 가까운 사우나라도 가볼까 하다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자주 가는 교회로 운전대를 꺾고 있었다.

서부영업소 건물 4층에 입주해 있는 조합사무실은 언제나 고즈넉했다.
영업판매직 주부사원들이 조합원들이라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사람들 출입이 거의 없었다.
10평 크기의 사무실을 지키는 사람은 왕위원장과 회사에서 파견 나온 김 과장 단 2명뿐이었다.
사무실 벽면에 걸린 대형 현수막의 비정규직 철폐! 문구가 더욱 공허해 보였다.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게 요즘처럼 힘든 적이 없다고 왕위원장은 생각한다.
사무국장을 할 사람이 없어 본사 과장에게 대행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게 노조의 현실인 것을. 단협에 보장된 전임자 2명을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대의명분 보다는 실리를 먼저 생각했다.
게다가 주부사원들이여서인지 조합비 내는 게 아깝다고 탈퇴하는 인간들이 있질 않나, 매장에서 일하다 생긴 스트레스조차도 노조에 말하면 무조건 해결해 주는 줄 알고 전화로 푸는 조합원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짜증대신 생글생글 웃으면서 언니들 말이 맞는다고 얼마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쳤던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노동조합을 20년 이상 지켜낼 수 있었을까?
회사와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틈나는 대로 영업 판로를 뚫었었다.
하루에도 대여섯 매장을 다니며  자사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회사가 노조를 그냥 내버려뒀겠는가?
이직률도 높고 뿔뿔이 흩어져 일하는 3․40십대 주부사원들을 데리고 똘망똘망한 남자도 없이 지금껏 노조를 지켰다!
이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때로는 회사의 직원으로서 때로는 노조위원장으로서 살아가는 걸 누가 비판할 수 있는가?
모두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회사가 특별성과급의 돈 잔치를 쏠 수 있도록 똥구멍도 슬슬 긁어주고 땡강도 부려가면서 말이다.
이렇게 사는 게 잘못된 방식이 아니지는 않는가?
모두가 주어진 조건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 않는가?
회사와 노조가 상생해야만 모두가 사는 게 아닌가?
그런데 천안지부가 생기고부터 그의 고민이 깊어갔던 것이다.

“왕위원장님? 오늘 있을 간부회의 자료 몇 부나 복사할까요?”
“넉넉잡고 20부 하면 되겠지.”
김 과장이 자료를 회의실 탁자에 올려놓는다.
“김 과장이 조합사무실에서 일한지 얼마나 됐더라?”
“1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천안지부에서 김 과장이 조합사무실에서 사무국장 대행을 하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난리나겠죠!”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김 과장이 본사로 복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사람들 눈도 있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천안에서 어용이라고 하겠죠?”
“사람들이 말이야, 본질을 볼 줄 몰라요. 눈에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짓까분단 말이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해주면 어디 덧나나?”
“거기는 요새도 매일 집회한다고 하던데요?”
“알고 있어. 한동안 조용하더니…. 천안공장장한데 매일 보고 받거든.”
“천안지부에서 상급단체 바꾸려고 조직형태 변경 총회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시죠?”
“앞 뒤 없는 인간들! 세상에 자식이 애비가 맘에 안 든다고 본조를 나가겠다는 게 말이 돼?”
“본조를 왜 나가겠다는 거죠?”
“자기네들은 생산직이니까 그쪽으로 가겠다는 거지. 영업판매직과 정서도 맞지 않고 지역에 있는 다른 생산직노조와 연대를 하겠다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본조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지.”
“어용이라는 소린가요?”
“요새 어용이니, 민주노조니 그런 게 어딨어? 다들 지밥 챙기기 바쁘잖아?”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우리 연맹에서도 산별로 가니까 그때 가서 교통정리 하자고 해도 난리 브루스를 치니, 누군 투쟁할 줄 모르나?”
“왕위원장님 골치깨나 아프시겠습니다.”
“쪽팔려서 원! 회사는 지부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고 하고…. 밖에 사람들은 오죽 못났으면 본조를 떠나 다른 조직으로 가겠냐고 빈정거릴 테니…. 사장님은 잘 달래보라고 하는데 금속으로 가겠다고 난리니 원?”
“금속이요? 거기 민주노총에서 제일 쌘데 아닌가요?”
“요샌 그쪽도 힘 못써!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아?
그리고 투쟁한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게 있나? 다치기만 하지.”
“천안이 김치공장이니까 조직을 바꾸려면 화학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굳이 왜 금속으로 갈려고 하는지, 그 속내를 모르겠어. 요새 화학쪽도 내부사정이 좀 복잡하기는 하거든!”
“위원장님? 기업별노조에서 지부가 산별로 가면 복수노조 아닌가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서 천안지부장에게 복수노조 되니까 불법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아니라는 거야?
요새 법원판례가 왔다 갔다 하니까! 노동부 유권해석은 아마 불법으로 판정하고 있을 걸.”
“천안에서 조직형태 바꾸면 일단 복수노조니까 불법이라고 시비 걸면서 우린 작업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시간 벌면서 거기 조합원들 분리시키면 되겠네요?”
“천안공장장에게 그런 취지로 얘기는 이미 해뒀어. 또 천안지부에서 금속으로 간다고 해도 받아주기나 한데?
쪽수가 많으면 모를까?”
“민주노총도 그렇게 사업하나요?”
“거긴 사람 사는 동네 아닌가? 비젼 없는 사업장을 누가 챙기려고 하겠어?
골치 아플 것 같은 사업장은 서로 안 받으려고 하지.”
“마치 사고 나면 경찰서에서 니네 관할이니 우리 관할이니 하면서 떠넘기는 것과 같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불쌍한 사람만 죽어나가는 세상이지. 하여튼 천안지부 말이야, 고마움을 몰라요.
지들이 시작할 때부터 잘나서 노조사무실 만든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야?
내가 사장님이나 본부장한데 얼마나 전화를 했는데. 거기다가 지부단협이나 지부임금 체결 할 때도 처음이니까 웬만하면 천안요구 들어주라고 가운데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지들이 투쟁해서 쟁취한 줄 알아요?”
“한번 내려가서 지부장이나 간부들 좀 만나보시죠?
본조를 나가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되지 않을까요?
회사 차원에서 관리하기도 힘들고.” “솔직히 거기 내려가긴 싫어! 본부장이나 회사에서 자꾸 부탁해서 마지못해 몇 번 갔었지.
처음 지부 생기고 한 달인가 지나서 내려갔는데 이 인간들이 위원장 만나겠다고 잔업을 다 재낀 거 아니야?
한창 공장 바쁘게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서 잔업은 다 하고 간부 몇 명이나 식사나 같이 하자고 했더니 전조합원과 상견례 하자는 거 아니야? 본사에서 전화오고 천안공장장에게 전화오고 생난리를 쳐서 겨우 진정시키고 지부장이랑 몇 사람 만났지.”
“기분은 좋았겠어요?
자기네 위원장 온다고 돈 안 벌고 만나겠다고 하니. 그런 노조 요새 드물잖아요?”
“사람들은 순수한 것 같은데 워낙 골통들이야! 회사가 있고 노조가 있는 거잖아! 몇 번 만났는데 말이 안 통하니 원?
위원장 말을 발톱에 낀 때 취급도 안한다니까! 문제는 그 지부장이지!
순진한 아주머니들 꼬여서 노동조합을 이용해 자기 야심만 채우려고 하는 전형적인 꾼 같아!”
“그렇다면 어떻게 손 써야 되는 거 아닐까요?”
“더 두고 봐야지! 만약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질 않아. 본사에 머리 좋은 젊은 애들 많잖아!”

김 과장과 얘기가 끝날 무렵 조합사무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간부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누가 사왔는지 떡볶이와 튀김으로 간단한 요기를 한 뒤 왕위원장이 간부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언니들, 하루 종일 서서 일 하느라 피곤할 텐데 이렇게 회의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에 있는 자료들 한번 보시고 제가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금년 상반기 간부교육 장소와 일정 건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회사 연수원에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1박 2일이구요. 작년에도 갔다 왔지만 쾌적한 환경과 호텔식 최신시설들이기에 여러분들에게 불편은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특히 회장님과 1시간 정도 간담회를 진행하려 하니 고충이 있으면 미리 잘 정리해서 건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연맹 위원장이 산별노조에 대해서 교육이 있을 겁니다.
다른 교육 프로그램들은 자료들을 참조해주시구요. 다음은 조합비 회계결산 보고입니다.
구체적인 사용내역은 그날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조합비가 좀 있어서 양수리 근방에 20평짜리 펜션 하나 장만했습니다.
조합원들에 한해서 언제든지 여러분 가족들과 휴식을 즐기라고 장만했습니다.
노동조합 MT도 거기 가서 하면 좋을 것 같고요. 원하시면 미리 연락주시구요. 제가 설명하는 도중에라도 궁금한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이번 달 봉사활동 건입니다.
지난달 중증 장애인 봉사에 이어 이번 달에는 고아원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음식도 만들고 아이들 목욕이며 청소도 할 예정입니다.
장소와 시간은 자료를 보시구요. 저희 노동조합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서 작년에는 구청장에게 표창까지 받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회장님이나 회사 관계자들도 노동조합의 이런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조합원들의 많은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소외받고 낮은 곳에 있는 불우한 이웃들을 직접 찾아가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우리 노조는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저 자신은 여기에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노조활동을 세상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노사가 상생을 도모하는 노동운동만이 살길입니다.
노동조합이 과거와 같이 투쟁하는 시대는 갔습니다. 국민들도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연초에 연맹동지들과 단사 위원장들과 함께 모란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전 태일 동지 묘지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왔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생하는 왕위원장님을 위해서 박수한번 칩시다!”
정년을 코앞에 둔 대의원의 박수 유도에 간부들이 손뼉을 치고 있었다.
“쑥스럽게 박수는…. 언니 정년이 올해죠? 언니는 2년 더 다닐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왕위원장님?”
“내가 다 해결해 드릴게요. 단협에도 나와 있잖아요?
일 열심히 하는 직원에 한하여 회사와 협의해 정년을 더 연장한다는.”
“고맙습니다. 전 정규직 같은 거 바라지도 않아요? 나이 들었다고 내쫒지나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난번 교섭 때 비정규직 50명을 무기계약직으로 만드는 것도 힘들었어요.”
“위원장님이나 되니까 그렇게 하시지 누가 할 수 있겠어요?”
“무기계약직? 그거 정규직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때 마다 근로계약 안 쓰고 회사 다니는 게 어딥니까?
우리 조합원들 대다수가 비정규직인데 차별 안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같은 매장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그러는데 팀장이 화장실 가는 것도 체크하고 사람들을 수시로 갈구나 봐요?
그래서 평소 그 팀장의 사람 됨됨이를 노조 게시판에 올렸는데 누가 그걸 지워버렸데요?”
“그 아가씨는 조합원인가요?”
“아니요? 제가 여성부장으로서 억울한 일 있으면 노조 홈페이지에 올리라고 했거든요?”
“우리는 자유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은 절대 지우지 않습니다. 누가 실수로 삭제시켰나?”
“제가 가끔 게시판에 들어가 보는데 어떤 조합원이 탈퇴하려면 어떻게 하냐고 글을 올렸던데 그것도 지워져서….”
“노조 입장에서 봤을 때 안 좋은 내용들이나 터무니없이 사실을 왜곡시켜 노조를 비방하는 글들을 버젓이 게시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회사 사람들도 들어와서 보는데. 하여간 노동조합은 고의로 글들을 삭제하지는 않습니다.
게시판 얘기가 나왔으니 말하겠는데 천안지부 게시판에 들어가면 거기 조합원들은 사진도 올리고 리플도 달고 그러던데, 우리도 이번 봉사활동 갈 때 사진도 올리고 댓글도 달고 좀 그러세요.  
홈페이지에 천안지부 글들만 올라와서야 되겠어요?
명색이 우리가 본존데 천안지부 보다 뒤쳐져서야 되겠어요?”
“거기 아주머니들은 진짜 현수막도 막 부쳐놓고 집회하고 그러던데, 뭣 때문에 그런데요?”
“우리가 싫답니다! 본조를 나가겠답니다.”
“왕위원장님이 그렇게 잘 해 줬는데,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아니에요?”
“그 말 들으니까 천안지부 사람들 정 떨어지네! 부모를 버리겠다는 후레자식 같은 사람들 아니에요?
왕위원장님 얼굴이 어쩐지 핼숙해졌다 했어요.”
“맞아! 맞아!”
“왕위원장님? 이건 다른 얘긴데, 전 요새 좀 심란해요.
출퇴근 할 때마다 보는 광경인데, 우리랑 비슷한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옆 동네에서 파업하고 있잖아요?
그게 남의 일 같지가 않더라고요?
마음 같아선 좀 도와주고 싶더라고요?”
“안타까운 일이죠. 행여 그 앞에 얼씬거리지도 마세요? 경찰들 쫘악 깔려 있잖아요.
재수 없으면 딸려갑니다.
그 사람들 안 돼보여서 연맹을 통해서 투쟁기금 냈습니다.
그리고 그 쪽 회사처럼 되지 않으려고 제가 회사 관계자들도 열심히 만나고 분주히 뛰어다니잖아요?
그러려면 여러분도 노동조합으로 더욱 단결해야 됩니다.
위원장이 뭐 하자고 하면 화끈하게 밀어주시면 됩니다. 알았죠?
그리고 오늘 간부회의 참석자가 열 분 정도만 오셨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합니다.
천안지부 보세요?
지부장이 뭐 하자고하면 그렇게 단결이 잘 된다고 하잖아요?
솔직히 어떤 때는 천안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알았어요. 왕위원장님. 우리가 분발하겠습니다.
이번 봉사활동에 많은 조합원들이 참석하도록 다들 노력하자고.”
“알았어요. 천안지부가 투쟁사업장 연대가는 것 보다 더 많이 참석하도록 하자고. 잊어먹지 말고 카메라 꼭 챙기고!”
“천안에 괜히 노조 생겨가지고 우리만 바쁘게 생겼다. 안 그래? 언니들!”
까르르. 간부들과 왕위원장이 검연쩍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왕위원장님만 믿습니다. 힘내세요!”
“왕위원장님 힘내세요!”
“그럼 간부회의를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으로 갈까요?”
“좋아요, 우리 오늘 맛있는 걸로 먹으로 가요? 대빵 비싼 거로요? 하하하…”

이상한 일이었다.
회사가 지금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는 않는 것은.
왕위원장이 체불임금 진정서를 노동부에 접수한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회사의 대응은 너무나 조용했다. 아마도 회사는 진정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느라 지금쯤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인이 끝나고 회사차원에서 어떤 방침이 내려지면 그때서야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다.
회사 또한 이 진정서의 이면에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을 데니 말이다.
피차 이 방면에는 노련한 선수들이 아닌가? 한두 번 장사 하는 것도 아니고 뜸도 들일만큼 들였으니 우선은 잠자코 기다려볼 작정이었다.
시간은 자신에게 앞으로 불리할 게 없고 아직 노동부에 출석할 날짜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체불임금 진정서에 피전정인으로 사장의 이름이 적시되고 진정인이 왕위원장 자신임을 알았을 때 회사는 아마도 처음에는 한동안 당황했을 것이다.
회사 창립 이래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일 테니 말이다.
어쩌면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고 흥분도 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로 그의 지난날들을 유심히 검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노총 소속의 위원장으로서 이런 진정서 하나 낸 걸 가지고 회사가 거추장스럽게 호들갑을 떤다면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아닐까?
대외적인 눈도 있고 이런 기본적인 나가리 정도는 해야 자신도 이 바닥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매년 노동부에서 지정하는 노사모범 우수사업장에 선정되도록 자신이 얼마나 협조를 해 왔는지 회사가 더욱 잘 알 것이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회사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든 결론은 궁극적으로 하나일 뿐이다.
아무리 천안지부가 생겨 방방 뜰수록 자신이 회사와 함께 가야 할 유일한 파트너라는 걸…. 아직까지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걸, 회사에게는 더 없이 유익한 존재라는 걸 이번 진정서가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왕위원장은 그렇게 자신이 직접 작성한 진정서를 여러 번 읽으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회사는 오랫동안 임시직들을 채용하여 영업판매직을 상시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길게는 1년 이상을 버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1~2개월 하다가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12시간을 하루 종일 서서 감정노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근무조건이나 근로환경이 열악해 이직률이 높고 자신의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는지 조차 아는 임시직은 드물었다.
노동자들 대부분이 월급을 주면 그러려니 하지, 뭐가 문제 있는지 따져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회사는 이런 약점을 이용해 시간외 근로수당이니, 휴일수당 같은 건 아예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
고정 OT라는 수당을 만들어 그것들을 상쇄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사는 그런 비정규직들에게 월급을 통장으로만 이채 하고 있었고 급여명세서도 없이 달랑 일용근로소득 원천영수증만 지급하고 있었다.
회사의 인력관리 또한 차별과 횡포가 심했다.
3개월 이상 재직 중인 미혼 여성에 한하여 우선 계약직으로 고용하고 있었지만 기혼여성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알바로 다니는 주부시원들이 사내에 꽤나 있었다.
회사는 그런 주부사원들을 선별해 이따금씩 계약직으로 전환해주면서 마치 대단한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인력관리를 하고 있었다.
조합원들 중에는 그런 장기알바는 없었지만 회사가 비정규직에게 대하는 모든 처우가 불평등하고 부당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화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공연히 거론해 회사에게 밉보일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 해도 회사와 충돌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마저도 떨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체념이 앞서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사실들을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회사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스스로 먼저 깨뜨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밀월관계란 그래서 더욱 달콤한 것이 아니던가?
마치 햇볕에 말린 이불을 덮었을 때 차악 감기는 그 뽀송뽀송한 편안함이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천안지부에서 이런 임시직 문제를 자신에게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사 소속의 수 백명의 노동자들이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임금을 체불당하고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고 있으니 본조와 위원장은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압력이 아니라 차라리 모종의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천안지부 게시판에 이런 글들이 올라오면서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체불임금 진정서를 마지못해 낸 것이었다.  

"왕위원장님 저희 왔어요?“
부위원장과 회계감사가 조합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얼른 책상에 있던 진정서를 양복 윗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어서 와! 언니들이 오전에 웬일이야? 온다는 연락도 없이.”
“왕위원장님, 큰 일 났어요? 천안지부에서 우리 노동조합을 또 비판하고 있어요?
이제는 회사와 결탁한 노동조합이라고 본격적으로 매도하고 있어요?”
“천안지부 게시판에 말이야? 이런 느자구 없는 자식! 이 자식 안 되겠구먼!”
왕위원장의 얼굴이 금방 험상 굳어졌다.
유난히 짧은 머리에 표독스러운 눈매가 살의까지 느끼게 했다.
“자기네들 금속으로 가겠다고 결의까지 해 놓고 가면 되지, 왜? 가만히 있는 우리 노동조합을 자꾸 흔드는지 모르겠어요?”
“임시직 문제 해결 못한다고 그러는 게 아니야?”
“그것뿐이 아니라니까! 우리 노동조합이 노사협의회와 같다는 거야? 거기다가 위원장의 자질과 품성이 어쨌다나?
“그 사람 가만 놔두면 정말 안 될 것 같지 않니?”
“무슨 수를 써야지! 우리 노동조합을 말아먹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어?”
“너는 그런 쓰레기 같은 글을 읽으면서 열불이 안나? 리플이라도 달아서 반박이라도 해야지!”
“우리 간부들에게 연락해서 댓글이라도 모두 달자고 하자!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매일 우리를 들들 볶냔 말이야!
본조가 무섭다는 걸 보여줘야 돼! 이건 비상사태야!
노동조합 그동안 잘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구 같은 놈이 사방천지를 분탕질을 하고 있잖아.”
“천안지부장, 그 사람 무슨 저의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랑 한번 맞짱 뜨자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 분명히 위원장님 자리를 노리는 게 틀림없어?”
“그럴지도 모르지. 용서할 수가 없어!”
“왕위원장님? 이번 기회에 그 사람 잘라야 되요!”
“가만히만 있지 마시고 무슨 얘기 좀 해 보세요?”
“회사에 얘기해서 천안지부장 잘라야 한다고 하세요?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하는 나쁜 놈이라고!”
“아까 매장에서 우연히 본부장님 잠깐 만났는데 오늘 오후에 조합사무실로 왕위원장님 만나러 온다고 하던데, 그때 꼭 말 하세요?”
“본부장님도 천안지부에서 하는 짓거리들 다 알고 있겠지?”
“그럼! 본사차원에서 체크 다 하겠지. 매일.”
“자식이 착한 부모에게 패악부리는 콩가루 집안 같다고 다들 그러겠다. 쪽팔려서 어디 살겠니?”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그 놈 숨통을 끊어나야 돼! 확실하게.”
왕위원장은 눈을 감고 두 사람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간 뒤 그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천안에 밀리면 지금껏 그가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명성이 하루아침에 모래알처럼 허물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온갖 억측과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천안지부 게시판을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잠가놔야겠다고 생각한다.
천안지부만 그렇게 하면 볼썽사나울 수도 있으니 아무 관련이 없는 아산지부 게시판도 잠그고 있었다.
며칠 전 난데없이 큰 눈이 왔지만 햇볕에 거리는 흙탕물처럼 질퍽이는 것 같았다.
건물 사이사이로 기다랗게 응달에 가려진 잔설이 남아있는 풍경은 그래서 더욱 개운치 않아 보였다.
유리창으로 투영되고 있는 오후의 햇살마저 따스하기 보다는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영하의 기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절은 봄이건만 그의 마음은 혹독한 추위에 가슴이 더욱 오그라졌다.

“아이고! 우리 왕위워장님, 안녕하십니까?”
깔끔한 양복차림의 본부장이었다.
“뭘 그렇게 창밖을 우두커니 보십니까? 어디 숨겨 논 애인이라도 생각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안녕이라니요? 병 주고 악 주는 겁니까? 하하. 지금 그 진정서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어디 조용한데 가서 식사나 합시다.”
“조용하기야 여기 조합사무실 만큼 조용한데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요?”
“요새 소화도 안 되고 컨디션도 안 좋네요.”
“천안지부 때문에 그러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깨 차고 거기에 적절한 현실적인 대안까지 마련하는 본부장은 차기 사장감으로 물망에 오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만면에 웃음을 달고 살지만 그의 내면은 섬뜩한 비수를 품고 있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왕위원장은 십 수 년을 직접 겪어오면서 알고 있었다.
“왕위원장님이 진정서를 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하.”
“체불임금은 정부에서도 엄하게 다스리고 있습니다.
사장님 잘못하면 구속까지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는 즈레 겁을 줬지만 쉽게 말려들 본부장이 아니었다.
“왕위원장님? 우리가 뭐 그동안 서운하게 대한 게 있습니까? 툭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가 어디 남입니까?”
“……”
“저희도 법무팀에서 다 알아봤는데 실무차원에서 뭔가 오해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대기업에서 이런 체불 건이 발생하다니 개인적으로 창피한 일입니다.
사장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면목 없다고 하셨고요.
아울러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줘서 고맙다고까지 얘기하셨습니다.”
“그러면 회사가 잘못을 인정하는 겁니까?”
“네. 이미 담당과장 모가지 쳤습니다.”
“제가 임시직 명부 받아서 대충 청진기 대봤더니 견적이 꽤나 나오겠던데요?”
“본사에 재직 중인 임시직만 3억이 소요됩니다.”
“3억이라…. 지방에 있는 영업판매직에 근무하는 임시직들은요?”
“그래서 제가 왕위원장님과 상의하러 온 거 아닙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퇴직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왜 이러세요? 그것까지….”
본부장으로서의 권위는 어디 갔는지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면서 왕위원장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대로 이야기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더 압박을 하고 있었다.
“원칙대로 하십시다!”
“왕위원장님? 우리 지금껏 윈윈 하면서 서로 협조 잘 하지 않았습니까? 진정서 낸 거 노조 쪽이나 대외적으로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천안지부에서 문제 제기 했지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왕위원장님만 저희 입장 좀 이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안 사이입니까?”
그도 이제 감추고 있던 자신의 패를 본부장에게 서서히 보여야 할 시점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천안지부야 지부장 하나만 보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본부장 또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집고 있었다.
“오늘 회사에서 천안지부장 고소할 겁니다. 명예훼손으로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동안 법무팀에서 천안지부에서 낸 모든 선전물을 검토했습니다.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충분히 먹히는 겁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고받은 것에 의하면 천안공장 관리자들과 몸싸움을 했나 봅니다.”
“천안지부장이요?”
“네. 천안공장 관리자들이 금속노조 가는 걸 막기 위해 노조 가입원서를 냈더니 방해한다며 옥신각신 하다가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나 봅니다.
서로 맞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걸 목격한 사람들이 모두 관리자들입니다. 하하. 보나마나 천안지부장 그 사람 자신이 맞았다고 조합원들 선동하고 선전물 낼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다렸다가 허위사실 유포로 걸면 됩니다.”
“쳐 논 그물에 걸린 격이네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완벽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천안지부장. 어차피 그 사람은 함께 가기는 힘든 사람 아닌가?
회사 입장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자기가 속한 조직을 험담 하는 것은 조직질서에도 위배되는 게 아닌가?
천안지부 처음 만들 때 자신을 배제시킨 것 처럼 이제 왕위원장 자신이 민주노총 단위사업장에서 그를 영원히 배제시킬 차례가 된 것이다.

“체불임금은 구정과 추석 때 귀향비조로 정산하면 안 되겠습니까? 워낙 회사가 어려워서…. 물론 전국에 있는 임시직들에게도 해택이 돌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회사 입장에서는 수억 깨지는 겁니다.”
“그건 편법 아닙니까? 하여간 회사분들 머리는 참 좋습니다. 그려.”
“칭찬입니까? 비꼬는 겁니까? 하하!”
“퇴직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굳이 그것까지 해결해야 합니까? 여기를 거쳐 간 사람들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왕위워장님만 대승적으로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회사가 있어야 종업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왕위원장님은 충분히 좋은 일을 하신 겁니다.
마치 홍길동 같은 일을 하신 겁니다.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우리가 교섭하면서 알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임시직들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귀향비 지급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할 겁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는 것 보다 하나씩 차근차근 제도를 만들고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왕위원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왕위원장님? 이제 진정서 그만 취하하시죠?”
본부장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며 살갑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왕위원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거절도 없이 쑥스럽게 웃으며 봉투 속의 내용물을 반쯤 꺼내 보았다. 0이 여러 개 있는 수표였다.
“좋은 데 쓰겠습니다.”
“왕위원장님이 어디 인 마이 포켓 할 분입니까? 깨끗하기로 정평이 난 분 아닙니까? 하하1”
두 사람은 그렇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조합사무실이 떠나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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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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